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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묘갈(鄭裕 墓碣) / 한호(韓濩)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7. 7. 10. 06:17
정유 묘갈(鄭裕 墓碣) / 한호(韓濩)
높이 150cm, 너비 62cm, 두께 20cm
조선시대 최고 명필 중의 한 명인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대사헌(大司憲) 정유(鄭裕, 1503~1566) 묘갈의 앞면 큰 글씨와 뒷면 작은 글씨를 모두 쓴 것입니다.
비문은 명재상으로 이름 높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짓고,
전액(篆額)은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이 썼습니다.
한호의 45세 때 작품으로 단정한 해서(楷書) 글씨입니다.
이 묘갈은 원래 수원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된 정유 묘역(수원시 영통구 하동 408-1)에 세워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 마모가 심해져 보존을 위하여 수원박물관으로 옮겨 왔습니다.
정유 선생은 1537년(중종 32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임명되었다가무반직인 사용(司勇),사정(司正) 등을 잠시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에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1554년(명종 9년)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된 뒤
한성부윤(漢城府尹)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며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학문과 제왕의 길을 강론하여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정유는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의 현손(玄孫)이며, 주부(主簿) 한수성(韓守性)의 딸과 혼인하여 2남을 두었다.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정공유지묘(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鄭公裕之墓)
청주한씨부(淸州韓氏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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