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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성전과 그 주변(동무, 서무, 삼문, 전사청, 수복청, 제기고, 묘정비각)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7. 18. 05:15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과 그 주변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이다.
남쪽의 삼문(三門)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 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다.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자 고쳐 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진다.
신삼문(神三門)
성균관의 정문인 신삼문은 문묘 배향 때만 문을 여닫는다.
신삼문을 통해 신이 서계를 통해 대성전에 오른다고 하여, 그러므로 왕이라 할지라도
평상시에 이 문으로 다닐 수 없어 진사식당 앞 하연대에 가마를 내려놓고 동삼문(향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대제를 지낸다. 이 건물과 공간을 통칭해 문묘라 한다.
대성전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대성전 동서에 있는 동무·서무에는 원래 공자의 70제자와 우리나라 및 중국의 제현(諸賢) 112위를 종향(從享)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묻었다.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조촐한 납도리 양식의 집이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문, 홑처마의 익공집이며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높은 장대석(長臺石) 기단 위에 세워지고 중앙간 및 양협간에도 2짝의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묘정비각(廟庭碑閣)
대성전 앞 뜰에 있는 비각(碑閣)으로서 태종 10년(1410)에 문묘를 복건(復建)한 뒤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의 연혁을 기록하게 하고, 각석(刻石)하여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에 서향 1간(間)으로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러나 인조 4년(1626)에 변계량이 썼던 문장을 다시 각석하고, 이정구(李廷龜)에게 명(命)하여 비음(碑陰)을 기록하게 하고,
이를 이홍주(李弘胄)가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좁은 비각 안에 묘정비가 들어 있는데 엄청나게 큰 거북이 등에 비를 모시고 있다.
수복청(守僕廳)
수복청은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종(從)들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대성전의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간(間)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다.
건물에는 대학당(戴學堂)이라는 현판 걸려 있다.
건물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규모가 있고 단정해 보이는 건물이다.
제기고(祭器庫)
제기고(祭器庫)는 각종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던 곳으로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며,
대성전 서쪽에 북향, 6칸 규모의 창고 건물이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종묘나 문묘, 기타 전각이 있는 곳에
제례 때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공간을 말한다.
문묘 전사청은 석전 때에 희생(犧牲)을 준비하던 곳으로서 성종 3년(1472)에
대사성(大司成) 이극기(李克基) 등의 요청에 의하여 대성전 서쪽에 동향, 6간(間) 규모로 건립되었다.
희생은 제사에 잡아올리는 산짐승 일컫는 말로 아마도 희생을 준비할 공간으로 창고와 비슷한 형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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