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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균관 명륜당과 그 주변(동재,서재,존경각,육일각)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7. 17. 05:30

    성균관 명륜당(成均館 明倫堂)과 그 주변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 공간이다.

    1398(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 전해진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지붕이 높고 앞뒤 폭도 너른 중앙의 강당인 본채와  폭과 높이가 좁고

    낮은 좌우 익실(翼室)이 덧붙여진 솟을집으로 강당은 이익공이며,

    익실은 초익공 구조로 본채와 익실에 명확한 위계를 둔 점이 특징이며

    강당은 마루로 되어 있고, 익실은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을 두었다

    기단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높게 쌓아올렸으며 강당채 앞은 월대를 널찍하게 두어 차별을 두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성균관 대학교가 생긴 이후에도 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교육기관으로서 유생(儒生)들의 학문 연구에 필요한 서적의 부족으로 교육상 많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한명회(韓明澮) 등 제신들이 장서각의 필요성을 주청, 성종의 윤허를 얻어 건립되었다.

    건물이 세워진 뒤 성종이 존경이라 이름하고 많은 서적을 하사하였다.

    그 뒤 장서가 많을 경우에는 수만 권에 이르기도 하였다.

    장서 구성은 성균관의 교육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수집에 있어서도 학령(學令학교모범(學校模範) 등에 정해진 독서 대상 서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본 장서는 사서(四書오경(五經제사(諸史)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도서이고,

    불교는 물론 노장(老莊) 및 기타 잡류의 도서는 금지되었으며,

    농학(農學) 등의 기술계 서적도 수장되지 않았다.

    도서의 수집 방법은 주로 경국대전에 정해진 반서제도(頒書制度)에 따라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도서를 분급받았다.

    전란 등으로 서적의 부족이 극심할 때에는 지방에서 인출되는 도서도 납본하게 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서의 출납은 2명의 전임 직원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성균관 직제에 의하면 시대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사예(司藝, 4전적(典籍, 6학정(學正, 8) 등의 관원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도서관 구성 조건의 세 가지 요소인 건물·장서·직원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1514(중종 9)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그 뒤 곧 재건된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화재 이후 다시 도서의 수집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다시 큰 화를 입게 되어 남은 책이 1, 2종에 불과하였다.

    그 뒤 임시로 존경각을 복설하고 낡아 누락되거나 더러워진 책 일부를 비치해오다가

    1626(인조 4)에 중건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고 장서도 증가되었으며, 1895(고종 32) 성균관의 학제 변경에 따라

    경학과(經學科)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란으로 인하여 장서는 모두 산실되고,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육일각(六一閣)

     

    성균관의 무기고였던 곳으로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 활과 화살, 활쏘기

    웅후(熊侯: 곰머리 표적미후(麋侯:사슴머리 표적)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라 하여 육일각이라 하였다.

    명륜당의 동북쪽에 위치한 남향의 두 칸 집으로, 1743(영조 19)에 건립되었다.

    원래 향사례(鄕射禮)와 대사례는 세종 때부터 실시되어 성종조까지 행하여졌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영조조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시행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대사례를 실시하였는데, 대사례가 끝난 뒤에는 그 용구들을 이 전각에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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