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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면 가옥(張勉 家屋) - 등록문화재 제357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7. 16. 05:30

    장면 가옥(張勉 家屋) - 등록문화재 제357호

     

     

     

     

     

     

     

     

    등록문화재 제357호 장면 가옥 -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문화재청)

     

     

     

     

     

     

    建國 外交 民主의 先驅者 雲石 張勉 先生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운석 장면 선생)

     

     

     

    작두펌프(Hand Pump)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심층수(深層水)를 끌어 올리는 작두펌프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우물이나 작두펌프로 물을 퍼올려 사용하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우물펌프, 무쇠펌프, 옛날펌프, 작두샘이라 불리운다.

    작두펌프는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 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많은 양의 물이 지하에 저장되어 있어도 마중하는 한 바가지의 물이 없다면 심층수를 퍼 올릴 수 없게 된다.

     

     

     

     

     

     

     

     

     

    저격범 김상봉이 보낸 참회의 봉합엽서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大韓民國 外交官 一號 旅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UN總會 大韓民國 承認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열다

     

    19606월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되었으며, 장면은 선거에 출마하여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되었다.

    이후 선생은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하기까지 4·19혁명이 제기한 시대적 소명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 피웠다.

    당시 그가 펼친 정책은 국민 참정권의 완벽한 보장, 외자 도입과 원조의 확대를 통한 장기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국민소득증대를 통한 빈곤탈출, 유엔 외교의 강화를 포함한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피, 국방력강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장면 선생이 이끈 제2공화국 정부가 경제제일주의를 내걸고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계승되고 현실화 되었다.

    당시 부흥부 산업위원회 위원이었던 김입산 전 경경련 고문은 군사정변 직후 군사정부가 내놓은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5.16 군사쿠데타이후 장면 선생은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어 사형을 구형 받는 등의 박해를 당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선생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96664일 지병인 간암 악화로 명륜동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대를 앞선 진정한 리더

     

    장면 선생은 1956515일 총선에서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해 9월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사주로 저격 당하였다.

    이후 선생은 4년간 순화동 공관을 반독재투쟁의 보루로 삼아 국민의 권익수호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정치의식의 원천은 민중들 속에 뿌리박고 있다.

    정치가는 이러한 민중의 의사를 통합하고 총체로서 결론짓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꾸미고, 실천단계로 옮기는 일꾼이라고 본다.

    민중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정치가는 위대할 것이요 그 나라는 부강해질 것이다.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장막을 제거하고 국민의 목소리와 표정을 직접 보아야만 할 것이라는 데서

    부통령 공관의 문호를 국민들 앞에 개방하는 것이다.”

     

    그는 4년간의 부통령 재임기간 현실의 독재정치와 관료 지배하에 왜곡된 경제구조 및

    고립적 대외관계를 초래하는 반일 정책 등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인권의 옹호, 다원화된 민주사회 건설,

    민간 위주의 경제건설과 공정한 분배구조의 정착, 한일관계의 정상화 등에 관한 제 정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

    이 같은 장면 선생의 정치적 이상들은 제2공화국 발족 이후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다.

    2공화국 당시 그가 펼친 정책은 하루아침에 급조된 장밋빛 청사진이 아닌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이 처한 현실에 부단히 투영해 보았던 정책대안들의 종합이었던 것이다.

     

     

     

    관용의 리더십

     

    장면 선생은 부통령 재직 중인 1956년 권총 저격을 당해 왼쪽 손에 관통상을 당했다.

    2공화국 국무총리에 오른 선생은 사형이 확정된 저격범들의 감형을 주선하는 관용을 실천하였다.

    1964727일 사형수 최훈은 5.16 군사정변 이후 자택에 칩거하던 선생에게 한통의 봉함엽서를 보냈다.

    속죄와 보은의 편지였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에게는 4·19가 일어나자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여가며

    살아온 불초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 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이 편지는 선생이 보여준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저격범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웅변한다.

    그의 인간 됨됨이의 넓이와 깊이는 자신을 암살하려 한 이들에게 보인 관용과 사랑의 실천에서 그 빛을 발한다.

     

     

     

    사상과 신념

     

    장면 선생은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치하에서는 교육운동과 종교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을 이끌어내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자유당 독재에 맞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하는 데 신명을 바친 건국. 외교. 민주주의의 선구자였다.

    또한 선생이 우리에게 남겨준 정신적 유산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지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장면 선생은 말한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鐵拳)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며,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장면 선생이 제2공화국 총리시절에 보여준 자유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민주화를 꿈꾸던 시절 그 운동이 지속될 수 있게 해준 희망의 기억이었다.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일궈낸 오늘,

    그의 삶과 정신은 우리의 앞길을 이끄는 이정표이자 좌표로 다가선다.

     

     

     

    믿음을 실천하다

     

    장면 선생님은 태어나자마자 영세를 받고 10세 되던 해 견진성사를 받은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신자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시절 일제의 지배하에 고통 받는 민족의 영혼 구제를 위한 천주교 신앙전파에 자신을 바칠 생각을 품었다.

    미국 유학도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갖추어야 할 신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선생은 가톨릭 신앙생활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완덕(完德)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18월 장면 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였다.

    이후 그의 세속적 지위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 바뀌어 나아갔지만, 평생토록

    성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서 서약한 바대로의 의무를 지키는 삶을 살아 나갔다.

     

    유수철 신부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신앙은 깊고 철저했다. 모든 언동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

    사생활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오직 천주님의 가르치심대로 실천한 성인이었다.

    우리 성직자도 따르기 힘들만큼 모범적이었다.

    그가 지닌 넓고 깊은 학식, 매사를 잘 처리해 나가는 역량, 그리고 숭고한 신앙심으로 인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선생은 믿음을 실천해 가정생활에서 자기 성화에 성공하였으며,

    사회생활에서도 복음적 표상으로 우뚝 섬으로써 성직자를 부끄럽게 하는 고결한 삶을 살았다.

     

     

     

    인생의 반려, 김옥윤 여사와의 만남

     

    장면 선생은 18세 되던 1916년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부친이 간택한

    천주교 집안인 김상집(金商集)의 막내딸인 당시 16살인 김옥윤(金玉允, 1901~1990)과 결혼하였다.

    김옥윤 여사는 선대로부터 믿어온 신앙을 바탕으로 묵묵히 부군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다.

    여사는 부군의 신앙을 바탕으로한 생활태도에 깊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박사는 천주교 신자니까 하느님의 뜻에 절대로 어긋나는 일을 아니하겠다는 그 신앙이

    바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신조가 된 것이 아닌가 해요,”라고 김옥윤 여사는 말했다.

    이러한 부인의 신뢰에 힘입어 장면 선생은 평탄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만년의 장면 선생은 결혼 직후부터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부인과 함께한 인생에 대해

    결혼부터 오늘까지 어언 50년간 나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회고하였다.

    임종 즈음에 선생은 혼배성사를 올린 중림동성당에서 결혼50주년 기념미사를 올리길 바라셨다 한다.

    그러나 갑자기 악화된 숙환으로 자택에서 기념미사를 올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 열흘 뒤 세상을 달리하셨다.

    부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결혼하였지만, 금혼식(金婚式)을 맞기까지 부부생활 50년 동안

    평화스런 가정생활을 누린 이면에서 성직자와 같이 구도자적 삶을 살아 간 장면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6.25전쟁과 나라지키기

     

    19501월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오해를 부른 애치슨라인이 발표되었다.

    장면선생은 달레스 미 국무성 고문이 방한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위한 만찬을 열어

    미국이 한국을 즉각 지원하겠다.”는 언약을 부탁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터진 하루만인 25(현지시간),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이사회에 참석하여

    북한군의 철퇴와 유엔 회원국의 침략자 원조금지를 규정한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냈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27일에 열린 안보리회의에서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 회원국들이 이를 격퇴하는데

    협조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미군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후 장면선생은 1951년 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하기까지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총사령부설치,

    대한(對韓) 구호안 가결, 가톨릭교회를 통해 지원 받은 구호금품 본국 급송 등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건국과 외교를 통한 나라 세우기

     

    장면 선생은 19485.10총선거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96일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은 그는 차석대표 장기영, 고문 조병옥과 함께

    921일 파리의 샤이요 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개회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장면 일행은 유엔 회원국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그 결과 19481212일 한국은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19493월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한 후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에 대한 33개국의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 특사로 태평양동맹의 체결을 모색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82년부터 1905년까지 겨우 여덟 나라만이 조선을 국가로 쳐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불과 3개월 만에 33개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내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초석을 쌓았다.

     

     

     

    교육자 장면과 저술활동

     

    일제에 의해 정치참여의 기회가 봉쇄되어 있던 식민통치기간 중

    양식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교육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다.

    장면 선생은 1931년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다

    1947년 교단을 떠날 때까지 17년간 후진 양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는 1933년 가톨릭교회가 배출한 지성들과 함께 교회사뿐만 아니라

    문화운동사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톨릭청년을 창간하였다.

    그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서 활약하면서 자신의 경해와 활동 등에 관련된 글들을

    신문지상이나 잡지에 왕성하게 게제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교부들의 신앙(1944)’,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서시오(1964)’등의 번역서와 영한교회용어집(1929)’, ‘구도자의 길(1930)’,

    조선천주공교회약사(1931)’,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등의 저서가 있다.

     

     

    미국유학과 신앙할동

     

    장면 선생은 구한말 서울관립 영어학교를 나온 부친 장기빈의 영향으로 유학의 필요성을 자각하였다.

    19203월 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 최우등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갔다.

    19219월 뉴욕소재 맨해튼대학에 입학해 19256월 학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영어.불어 구사능력과 수사학과 대중연설 같은 과목을 통해 얻은 소통능력은

    그가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나 주미대사로 선발되는데,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6.25전쟁 시 유엔군 파병 등의 업적을 남기는데 기여한 지적 자산이자 소양으로 기능하였다.

    19218월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 후 자신의 세속적 지위가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 바뀌었지만

    평생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신앙을 실천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적표상이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이 민족의 지배하에 상처 입은 민족의 영혼을 달래는 신앙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면 연보(張勉 年譜)

     

    1899. 8 출생(서울 중구 적선동 외가)

    1912. 3 인천성당부설 사립박문학교 고등과 졸업

    1914. 4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입학

    1916. 5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김옥윤 여사와 결혼

    1917. 3 수원농림학교 졸업

    1917. 9 서울 기독교청년회관(YMCA) 영어과 입학

    1918. 4 용산 천주교 소신학교 교사 취임

    1920. 3 서울 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 최우등 졸업

    1921. 8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1921. 9 미국 맨해튼(Manhattan)대학 입학

    1925. 6 미국 맨해튼대학 졸업

    1925. 8 바티칸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대표로 참석 후 귀국

    1931. 4 서울 동성성업학교 교사 취임

    1931. 9 ‘조선 천주공교회 약사출간

    1936. 11 동성상업학교 교장 취임

    1939. 11 계성보통학교 교장 취임

    1939. 9 천주교 서울교구 청년회 연합회 회장 취임

    1944. 6 ‘교부들의 신앙번역. 출간

    1945. 8 광복

    1946. 2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 취임(천주교 대표)

    1946. 12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취임

    1948. 5 제헌국회의원 당선(종로을구, 무소속)

    1948. 12 3차 유엔총회 한국 수석대표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 획득

    1948. 12 바티칸 교황청 파견 대통령 특사

    1948. 12 맨해튼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1949. 3 대한민국 초대 주미대사 취임

    1950. 4 대통령특사로 호주 뉴질랜드 등과 태평양동맹체결교섭

    1950. 6 북한군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1950. 6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파병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냄

    1950. 12 미국 포담(Fordham)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1951. 2 2대 국무총리 취임

    1951. 5 교황청 훈장 수여(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St, Sylvester)

    1952. 4 2대 국무총리 사임

    1955. 9 민주당 창당, 최고위원 선출

    1956. 5 4대 부통령 당선

    1956. 9 민주당 전당대회 석상에서 권총 피격

    1957. 6 미국 시튼홀(Seton Hall)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 받음

    1957. 11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받은 저격범에 대한 관용 요청

    1959. 11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당선

    1960. 4 4.19혁명

    1960. 8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취임

    1961. 3 국토건설대 발대식

    1961. 4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

    1961. 5 5.16군사정변으로 실각

    1962. 4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번역. 출간

    1962. 8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

    1963. 2 항소심 판결에서 징역 3, 집행유예 5년 선고

    1963. 9 한국 프란치스코 제3회 회장 취임

    1964. 7 ‘성 원선시오번역. 출간

    1965. 3 천주교 혜화동성당 평의회 회장 취임

    1966. 6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장례식

    1999. 8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장면(張勉, 1899.08.28~1966.06.04)


    본관은 인동(仁同).  세례명은 요한. 호는 운석(雲石).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당시 외국계 석유회사 및 상사 중역으로 근무한 장기빈과 황 루시아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제하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으며,

    광복이후 가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85.10 총선거에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와 부통령,

    그리고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가였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 승인직후, 초대 미국대사로 임명되어 19506.25전쟁 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내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었다.

     

     

     

    장면 가옥(張勉 家屋)

     

    문화재현황

    - 등록번호 : 등록문화재 제357(지정일 : 2007.10.01)
    - 시기 : 일제강점기
    -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553 (명륜동 1)
    - 규모 : 대지 403, 연면적 205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운석 장면(1899~1966)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1937년 장면의 처남인 건축가 김정희가 설계하여 한.ᆞ양 절충식으로 지은 이 집은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과 화장실의 내실화(內室化),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개량운동과 신주거 문화운동의 영향이 드러나 있어

    근대 주거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료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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