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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근정전 일원(景福宮 勤政殿 一圓)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8. 6. 05:30

    경복궁 근정전 일원(景福宮 勤政殿 一圓)

     

     

     

    영제교(永濟橋)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고도 불렀는데,

    경복궁의 금천교를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를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를 옥천교(玉川橋)라고 하여 별도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고 한다.

    태조 4(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다리이며, 세종 8(1426) 영제교라고 이름지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해체되었고, 해체된 석재 일부가 수정전(修政殿) 앞에 방치되어 있다.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이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후 흥례문 일곽을 중건하면서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하였다.

     

     

    금천(錦川)

     

    금천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금천으로 백성과 왕의 영역이 구분되어지고,

    궁에 입궐하는 사람들은 이 금천을 지나면서 모든 악한 것을 물에 씻어 보낸다는 의미가 있었다.
    금천은 이 외에도 궁의 배수로 역할을 했으며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궁에서 위급상황 시 소방수 역할도 했다.

    원래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향원정, 경회루에서 배수된 물이 이 금천을 따라 동쪽으로 나가

    삼청동천(중학천)을 따라 청계천으로 흘러 한강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해체되는 아픔을 겪고 다시 복원되었지만 그때처럼 배수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景福宮 勤政門 行閣) - 보물 제812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태조 4(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근정문(勤政門)은 앞면 3·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行閣)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측으로는 사정문(思政門)이 있어서 사정전과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근정문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로 지어져서

    법궁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었으며,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화문(日華門)

     

    경복궁 근정문의 동쪽에 난 작은 문으로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문반(文班)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

    일화(日華)’해의 정화를 뜻하며 []’는 음양의 이치 상 양()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선정전 앞에 있던 두 문 가운데 하나를 일화문으로,

    다른 하나를 월화문으로 지은 적이 있다.

     

     

     

    월화문(月華門)

     

    경복궁 근정문의 서쪽에 난 작은 문으로,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무반(武班)은 월화문으로 출입했다.

    월화(月華)’달의 정화를 뜻하며, []’은 음양의 이치에서 음()의 성격을 띠므로, 서쪽 문의 이름으로 택했다.

     

     

     

     

    유화문(維和門)

     

    홍례문을 들어서 금천 너머 좌측을 보면 유화문이 보인다

    이 문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의 관원(신하)들이 경복궁을 출입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 영제교가 복원될 때 함께 복원되었다.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 국보 제223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으뜸 전각(殿閣)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王權)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卽位式)이나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조회(朝會),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태조 4(1395)에 지었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1867) 다시 지은 것이다.
    근정전(勤政殿)은 궁궐전각 밑에 놓인 섬돌의 월대 2단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앞면 5, 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基壇)인 월대(月臺)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屛風)을 놓았으며, 천장은 쌍용무늬보개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은 회랑으로 둘러싼 마당, 즉 조정(朝庭)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였다.

    어도 좌우에는 문무백관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근정전 월대의 시설물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난간을 부르고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의 사신(四神)과 십이지산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범전으로서의 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물상으 근정전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들이며,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과 친근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기단 좌우측에는 향로가 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근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향을 피우던 의기(儀器)이다.

    궁궐의 주용 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화마(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조회는 한양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렸는데,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 하였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근정전 박석의 차일고리

     

    근정전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 동그란 쇠고리(薄石고리)가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왕과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있을 때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근정전 현판

     

    근정전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흥민(李興敏)이 썼다.

    이흥민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때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고 고종대에도 도승지 등 높은 관직에 있었던 문신이다.

    ()’자는 왼쪽 변의 아래 쪽에 가로획이 하나 생략되어 있는데, 서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처마 밑의 그물과 오지창

     

    근정전 처마 밑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라고 한다.

    최근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라 목조건물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회랑이나 궐담 등 그물을 치기 힘든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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