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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8. 12. 05:00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건청궁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갖춘 구조로 되어 있다.
궁제에 얽매이지 않고 단청이나 잡상 등으로 장엄을 베풀지 않았다.
사대부 집처럼 구성됐다는 점에서 창덕궁 연경당과 유사하다.
그러나 창덕궁 연경당이 외척과의 싸움을 효명세자에게 맡기고 순조 자신은 비교적 여유롭게 머문 곳인 데 비해
건청궁의 고종은 숨 가쁘게 변전을 거듭하는 국제 정세를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 했다.
곳곳에서 벌떼같이 일어나는 백성들의 궐기로 전전긍긍했고, 청나라와 일본,
서구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시달렸으며, 최대의 버팀목이었던 왕비를 이곳에서 잃었다.
건청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고종 10년(1873)에 지었다.
물론 경복궁 동북쪽에 선원전이 있었으나 태원전, 문경전, 회안전에 아우르는 별도의 어진 봉안장소가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때는 세도정치에 신물이 난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부르짖으며 섭정을 드세게 밀고 나가던 시기이자,
일방적으로 국정을 끌어가는 아버지와 그로부터 권력을 돌려받으려는 고종의 대결 구도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다.
흔히 말하기를 대원군이 왕권강화의 상징으로 경복궁을 중창했듯 고종은 친정체제의 상징으로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만의 궁전을 지었다고 하지만 《고종실록》의 기사는 사뭇 다르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건청궁에서 한가로이 지내도록 하고 자신의 뜻대로 섭정을 계속하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해 11월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국정에 간여한 자”라는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더 이상 대권을 붙들지 못하고 운현궁으로 물러났고, 고종은 비로소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친정을 선언한 지 한달도 안 돼 내전 일부가 불에 타버렸고, 2년 뒤에는 내전의 핵심 전각 830여 칸과
역대 임금의 필적, 보물, 옥새는 물론 모든 어보와 부신(符信)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친정 초기의 불운이었다.
그래서 침금은 창덕궁과 경복궁으로 이어와 환어(還御)를 거듭했다.
경복궁 내전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기형상태에 놓였으므로 건청궁은 건립 이래 12년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임금은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으므로 건청궁에서 쉴 틈도, 어진을 봉안할 기회도 길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이 애용했던 정무공간
건청궁이 주인을 제대로 맞이한 것은 고종 22년(1885) 1월이었다.
9년 전 불탄 경복궁 내전 지역을 복구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금이 돌아온 것이다.
마땅한 거처가 없던 임금은 건청궁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내전이 복구(1888)된 뒤에도 고종은 거처를 바꾸지 않고 러시아 공관으로 떠날 때까지 12년간 건청궁을 지켰다.
그는 엄격하고 딱딱한 경복궁 중심 공간에서 벗어나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이곳을
편안한 장소로 여겨 정무를 관장하고 외교관을 만났다.
건청궁은 건립 의도와 관계없이 주요 정무 공간으로 위상이 바뀌고, 궁궐 경영 방식도 달라져 정치활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때로는 주변의 흥복전, 만경전, 함화당, 집옥재도 외교 사절을 접견하거나 거처로 이용했다.
고종 내외는 교태전이나 강녕전보다는 건청궁과 그 주변 전각에서 나라 일은 물론 외교 활동을 벌였으므로
이 일대가 이들의 실질적 정무처였다. 고종의 건청궁 시대는 조선을 사이에 두고
일본, 러시아, 청나라의 힘겨루기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 현장(現場)
명성황후가 드센 일본을 멀리하기 위해 활동한 곳은 관문각(觀文閣)이었다.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건청궁 건립 당시 관문당이라 했던 것을 고종 25년에 다시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2층 건물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이 건물은 명성황후의 외국 손님 접견과 연회 장소로 이용됐다.
조선 지배를 발판으로 대륙 진출의 꿈을 꾸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명성황후가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아시아 평화와 자주 조선을 위해 민비를 없애자.”
‘여우사냥’으로 명명한 명성황후 제게 작전의 최종 결재권자는 이토 히로부미,
각본 일본 내각, 연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무대신), 주연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공사),
칼잡이들이 행동대로 출연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육군중장으로 퇴역한 미우라는 외교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전개되는 난국을 타개하는 데는 무단적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년) 9월, 이노우에는 미우라에게 여우사냥 작전 지휘권을 넘겼다.
미우라는 원활한 임무수행을 위해 시바 시로(柴四朗), 다케다 한시(武田範治),
스키나리 하카루(月成光) 등과 동행해 조선에 발을 디뎠다.
시바는 하버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다케다와 스키나리는 조선 사정 전문가였다.
10월 2일, 미우라는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신보 사장)를 공사관으로 불러 암살단 조직 자금을 전달했다.
10월 7일, 민영준이 궁내부대신으로 내정된 축하 연회가 경복궁에서 화려하게 베풀어지고 있는 시각,
진고개 파성관에서는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한성신보 주필)와
야마다 레세이(山田烈聖, 일본신문 특파원)의 지휘를 받는 각계 인사 56명과 암살단이 화려한 출정식을 가졌다.
10월 8일 새벽, 암살단 일부는 대원군이 칩거 중인 공덕리 아소정(我笑亭)을 점령한 후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남여에 태우고 어둠에 휩싸인 3시에 경복궁으로 출발했다.
새벽 5시쯤, 광화문 앞에서 홍계훈이 지휘하는 궁궐수비대와 부딪혔으나 10여 분 만에 제압했다.
암살단은 광화문과 용성문을 통과해 대원군을 강녕전에 내려놓고,
은밀히 진행하다가 태원전 건숙문 앞에서 건충궁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자객들은 유형문, 광임문을 거쳐 건청궁 서쪽 어구를 건넜다.
그들은 곤녕합 동행각을 왼편에 끼고 북쪽으로 침투하다
복수당 서북 출입문인 경화문 앞에서 잠시 머물러 ‘여우사냥’의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경화문과 청휘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들은 장안당과 곤녕합에 닿자마자 거미새끼처럼 흩어졌다.
장안당으로 침투한 폭도들은 잠결에 일어나 공포에 떨고 있는 임금과 세자에게 왕비를 찾아내라고 닦달했다.
세자는 상투를 잡힌 채 폭도가 휘두른 칼등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
다른 무리는 왕비를 찾아 곤녕합, 옥호루를 휘젓고 다녔다.
이 북새통에 왕비는 나인 복장으로 병풍 뒤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금방 발각돼 두 명의 궁녀와 함께 장안당 뒤뜰로 끌려나왔다.
그리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최후를 맞았다.
명성황후의 최후에 관해서는 정황이 명확하지 않다. 곤녕합 툇마루에서 변을 당했다는 추리도 있다.
이 과정을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붙들린 왕비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고 기록했다.
이때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달려왔고, 이경직이 가로막고 나서자 서슴없이 칼로 탈을 자르고 총으로 심장을 겨눴다.
왕비의 시신은 옥호루로 잠시 옮겨졌다가 홑이불에 덮여 녹산 남쪽으로 끌려갔다.
시해범들은 끌고 간 시신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이어 시해범들은 경복궁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물색도 모르는 훈련대 군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일어난 일어었다.
아침 7시, 일본공사 미우라가 고종 앞에 나타나 호기를 부렸다.
“그간 중전 민씨가 국정을 어지럽히고 종묘사직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변란이 일어나자 중전은 지난번 임오군란 때처럼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으니 중전의 자격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쫓아내십시오.”
그리고 훈련대 군인의 난동을 엄벌할 것,
죽은 궁내부대신 이경직 후임으로 임금의 형 이재면을 앉히고 친일 내각으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왕비를 삼켜버린 불꽃이 잦아들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훈련대는 간간이 야간 훈련에 동원되었다.
왕비가 참혹한 꼴을 당할 때도 훈련대 군사들은 일본 암살단과 내통하고 있던 지휘관 명령에 따라 통상적인 훈련으로 알고
명령에 따라 궁궐 주변에 머물렀다.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尹錫禹)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밤의 끔찍한 사정을 잘 모르는 그는 녹산에서 타고 남은 유해를 발견했다.
그래서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에게 궁녀의 시체냐고 묻고 임금의 거처 가까이에 유해를 방치할 수 없는 게 아니냐고 건의했다.
왕비시해를 방조했던 우범선은 “만약 해골이 남아 있으면 연못에 던져 버리고 그곳을 말끔히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우범선의 지시대로 유골을 향원지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타다 남은 뼈 몇 조각을 수습하여 후원의 오운각 서쪽 산자락에 고이 묻었다.
사건의 종료로 미우라의 임무도 마감됐고, 조선주재공사는 고무라주타로(小村壽太朗)로 바뀌어 고종의 감시자가 됐다.
건청궁(乾淸宮)의 구조(構造)
건청궁의 주요 건물은 장안당, 곤녕합, 복수당이다.
건청궁의 외곽은 ㅢ자 형태의 동남쪽 행각과 거기에 연결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향원정 북쪽 언덕배기에 있는 전기 발상지 표지석 앞은 장안당 남쪽 담이다.
이 담과 동쪽에 잇댄 삼량집 홑처마 행각이 직선을 이루며 건청궁 외곽의 남쪽 경계를 이룬다.
이 행각 밖은 네 개의 굴뚝이 지붕을 뚫고 치솟았다.
서쪽에서 첫 번째와 둘째 굴뚝 사이에 행각보다 높게 뜬 지붕을 얹을 소슬문이 있다.
작고 아담하지만 당당한 건청궁 정문이다. 별도의 문 이름 대신 ‘乾淸宮(건청궁)’이라는 편액이 붙었다.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외행각 모서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담장에는 인유문이 있다.
인유문은 녹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유문 안에는 ‘명성황후순국숭모비’가 있다.
건청궁을 들어서면 가로로 좁게 펼쳐진 직사각의 바깥마당이 있다.
이 공간은 시골집 마당과 같고 아파트의 거실과 같다.
소슬문 바로 앞의 행각문은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함광문이다.
마당 서쪽, 곧 소슬문 왼편에 보이는 초양문은 장안당 출입문이다.
임금의 거처로 들어가는 초양문은 곤녕합 남행각의 함광문과 품격이 다르다.
번듯한 사주문에다 부연을 덧댄 팔작지붕이다. 초양문의 북쪽에는 3칸집이 남북으로 붙어 있다.
이 집의 좌우는 담장을 쳤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초양문 오른편 안팎의 협문을 거쳐야 한다.
이 집의 쓰임새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귀중품이나 은밀한 물건을 관리하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 내외가 특정 물품이나 공개하기 곤란한 서적 따위를 보관하기 위해
출입을 규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고종(高宗)의 건청궁(乾淸宮) 탈출(脫出)
왕비가 시해된 뒤 일본 세력에 포위된 임금을 죽음과 공포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나름의 신변보호책을 개발했다.
눈앞에서 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일절 먹지 않음으로써 독살을 피하고자 했고
밤이면 권총을 소지한 미국 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침실을 지키도록 했다.
10년 전 승은을 입었다가 왕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도 다시 불러들여 위안을 삼고, 신변을 돌보게 했다.
엄상궁은 경복궁에서 언제 변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불안에 떠는 고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엄상궁이 추천한 안전지대는 외국공관이 밀집한 정동이었다.
이 무렵 남산 일대는 일본인, 명동과 북창동 지역은 중국인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정동 일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관들이 포진하고 있어 이른방 ‘양이’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엄상궁을 외교관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정동에 머무르는 것이 일본의 입김에서 벗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건청궁의 숨 막히는 생활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고종은 친미파, 친러파 성향의 인사들,
곧 종친 이재순과 이범진을 비롯한 대관들과 임최수, 김홍륙 등 시종신들에게 밀지를 내렸다.
춘생문(春生門,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에 있었던 후원의 동문)을 통해
이들을 은밀히 입궐하도록 하여 궁궐 탈출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들은 11월 28일 새벽에 친위대 병사 800여 명을 동원해 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엉성한 진행으로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아관파천(俄館播遷)
경복궁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친러파 인사들은 러시아 공사관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일러줬다.
고종은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친러파 이범진에게 들려 러시아 공관에 전달했다.
고종 33년 1월 초 베베르 후임으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피에르(Alexis de Speyer)는 고종의 희망을 본국에 타전했다.
러시아 외무부로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일본의 세력을 누르고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차지하려는 러시아의 야심과 고종의 소망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조선 임금만 품안에 들어온다면 조선 정책을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러시아 군함 2척이 제물포로 즉각 발진했다.
러시아 공사관은 제물포에 상륙한 해군을 서울로 불러들여 고종의 탈출 작전을 엄호하도록 했다.
베베르는 멕시코 공사로 전임 명령을 받았으나,
부임지로 출발하지 않고 공사관에 남아 고종이 도착할 때까지 작전을 총지휘하기로 했다.
그는 신임공사 스피에스와 이범진, 친미파 이완용, 이윤용 등과 함께 기민하게 움직였다.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틈을 이용하여
친러파는 궁녀 김씨와 엄상궁을 통해 탈출 계획이 완료됐음을 고종에게 알렸다.
2월 11일 새벽, 이범진과 이완용 등은 각본에 따라 뜰을 거닐고 있던 고종을 교자에 태워 영추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동안 궁녀 김씨가 교자를 타고 영추문을 빈번하게 출입해 감시를 무디게 했으므로
수문 군사들은 교자안 인물이 임금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자 척은 다른 문을 이용했다.
세자빈 민씨, 창덕궁에 머물던 대비 효정왕후(헌종비)도 탈출로를 달리 하여 경운궁을 향해 새벽길을 재촉했다.
새벽 6시를 조금 넘겨 상궁 엄씨의 치밀한 주도 아래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에 무사히 당도함으로써 상황이 끝났다.
김홍집 내각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작전이었다. 왕족이 빠져나간 경복궁과 창덕궁은 껍데기만 남았다.
이후 건청궁은 방치된 경복궁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제는 건청궁 일대의 건물을 헐고(1909), 병합 25주년 기념 박람회장(1935)으로 사용하면서 철저히 훼철했으며,
4년 뒤(1939)에는 건춘문 앞의 본관 건물이 좁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 별관을 지었다.
이 미술관은 광복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1995년부터는 전통 공예 전시관으로 쓰다가 헐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빈 터였던 이곳에는 2007년도 가을 개방을 목표로 장안당, 곤녕합 등 14동과 담장 210m를 되살렸다.
장안당(長安堂)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거나 외직으로 나가는 신하 등을 만나는 일이 이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때 임금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편전은 국왕이 일상 정무를 보는 곳이다.
1873년(고종 10년) 건청궁을 지을 당시에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은 2006년 복원할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장안(長安)’이란 ‘오랜 동안 평안하게 지내다’는 뜻이다. ‘장(長)’은 ‘오랜 시간’, ‘안(安)’은 ‘평안함’을 의미한다.
규장각이 소장한 『어필현판첩(御筆懸板帖)』(奎10293)에 고종 친필의 장안당 탁본이 수록되어 있어,
장안당 현판 글씨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어필현판첩』은 188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현판은 이 현판첩에서 모사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御筆(어필)’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좌측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장안당은 건청궁의 중심 건물이다. 사대부 집이라면 사랑채에 해당한다.
전체 27칸, 세 벌 장대석 위에 올린 장안당 단면은 3칸 7량집이며 이익공 포작이다.
지붕에는 용두를 얹고 처마는 막새로 마감했다. ㅏ자 형태로 설계한 평면은 앞면 6칸, 옆면 1칸이며 앞뒤로 툇간을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서쪽 2칸, 동쪽 1칸은 방이다. 대청 앞에 붙은 장안당 편액은 고종 어필이다.
ㅏ자 형태의 북서쪽에는 田자 모양의 앞, 옆 2칸의 침방이 정화당,
그 남쪽은 5칸의 추수부용루라는 누마루다. 정화당은 9칸으로 짜인 囲자 형태의 강녕전 침소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추수부용루 5칸 중 남쪽으로 돌출한 2칸은 단을 높였다.
장안당 동쪽은 복도각을 통해 곤녕합 서행각과 만난다. 복도각은 본채보다 단을 낮췄으며 지붕은 본채 처마 아래 놓였다.
장안당 구역은 건청궁 궁역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공간의 동쪽은 짧은 샛담과 연결된 다양한 행각으로 막혔고, 나머지 세 면은 담이 ㄷ형태로 에워쌌다.
남쪽 담과 만나는 서쪽 담에는 필성문이 있다.
향원정 서북쪽의 열상진원에서 전기 발상지로 이르는 계단을 올라서면 맨 처음 눈에 띄는 문이다.
건청궁 남행각의 소슬문을 거치지 않고 장안당으로 진입하려면 필성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필성문은 교태전 건순각 뒤편의 연휘문과 비슷한 월문이다.
서쪽 담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일각문인 관명문과 취규문이 16미터 정도 간격으로 열려 있다.
취규문 안은 장안당 북행각이다. 북쪽 담장을 뒤로 하고 나란히 펼쳐진 북행각은 22칸의 5량집이다.
방과 마루, 창고로 구성된 북행각은 건청궁을 밝혔던 수력발전기가 있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북행각과 장안당 사이의 넓은 마당에는 고종 내외의 외교활동 거점이자 연회공간이었던 관문각이 있었다.
관문각은 도면이나 유구가 없어 이번에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
북행각 서북쪽에는 북쪽 궁성의 암문인 계무문이 있다.
계무문은 후원에서 문과 시험을 치를 때 행사관련 관리들이 이용했던 문이다.
함광문(含光門)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함광(含光)’은 ‘함만물이화광(含萬物而化光)’에서 온 말로, ‘만물을 포용하여 공화(功化)가 빛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역』「문언전」에서 곤도(坤道)의 특성을 설명하며,
“곤괘는 지극히 유순하되 움직임이 강(剛)하고, 지극히 고요하되 덕(德)이 반듯하다.
뒤에 따르면 얻어서 이로움을 내세우며 떳떳함이 있다.
만물을 포용하여 공화(功化, 감화시킴)가 빛난다.
곤도는 순하도다! 하늘을 만들어 때에 맞게 행하도다.”라고 한 데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함광(含光)’은 ‘빛을 머금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미덕을 몸에 지니고서도 드러내지 않는 상태, 곧 지극한 덕을 지니고 있음을 비유할 때의 표현이다.
한나라 채옹이 지은 「진태구비문(陳太丘碑文)」에,
“빛나도다, 진군이여! 이 세상에 태어나 순덕(醇德)을 머금어[含光]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그 용례이다.
이곳이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상기하면 이와 같이 이름 지은 의미를 알 수 있다.
곤녕합(坤寧閤) - 명성황후 시해장소(明成皇后 弑害場所)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1895년(고종32)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곤녕(坤寧)은 도덕경에 '하늘은 하나로 맑고(淸), 땅은 하나로 평안하다(寧)'라고 한 것에서
건천곤령(乾淸坤寧)이란 사자성어가 나왔다.
임금은 하늘같아야 세상의 질서가 서고,
황후는 지내기 편안한 땅처럼 만물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7년간 시의(侍醫)로서 왕비를 모신 미국인 엘러스 벙커(Annie Eellers Bunker)여사는
곤녕합의 주인인 명성황후에 대해 부드럽고 친절하며 조선여성으로서의 미를 갖춘 미인이라고 회상하였다.
비명에 간 왕비를 위해 고종이 친히 쓴 ‘행록(行錄)’에는 왕비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어려운 책도 두어 번 읽으면 다 기억했으며, 학식이 많고 판단력이 뛰어나
자신이 외교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 도움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1895년 2월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은 한반도에 잔류하려고 했지만 고종이 완전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군부는 왕실을 압박하는 비상사태를 만들기 위해 10월 8일 새벽에 민간인 복장을 한
민완 장교들이 장사패를 끌고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락에서 태우고 남은 뼈를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빈전을 마련하고 국장을 지냈다.
곤녕합(坤寧閤)
건청궁 경내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쪽에 함광문, 북쪽에 복수당이 있다. 왕비가 거처하던 공간이다.
한편 이곳은 1895년(고종 32년) 8월 20일, 일본인과 2훈련대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도 곤녕합 기둥에서 살해당했고,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였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이다. 왕비의 덕성을 드러내었다.
‘곤(坤)’은 『주역』64괘의 하나로 지도(地道), 처도(妻道), 신도(臣道)를 상징하며, 그 특성은 유순함으로 설명되었다.
이 같은 곤괘의 의미를 살려 왕비가 거처하는 건물의 이름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명과 청나라의 궁궐에도 황후가 거처하는 곤녕궁이 있었는데, 건청궁의 곤녕합도 이를 참조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이 소장한 『어필현판첩』(奎10293)에 고종 친필의 곤녕합 탁본이 수록되어 있어,
곤녕합 현판 글씨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어필현판첩』은 188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당과 마찬가지로 ‘御筆(어필)’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왼쪽 아래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곤녕합 주련(坤寧閤 柱聯)
陌上堯樽傾北斗(맥상요준경북두)
밭두둑의 요 임금 술잔은 북두(北斗)를 기울게 하고,
이 구절은 태평한 세상에서 백성들이 논밭에서 일하다가 근심걱정 없이 술잔을 기울이니
하늘의 북두칠성도 거기에 응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는 뜻이다.
‘요준(堯樽)’은 ‘요 임금의 술잔’이라는 뜻이지만 태평한 세상에서 근심걱정 없이 마시는 술잔을 의미한다.
『공총자(孔叢子)』라는 책에 ‘요주천종(堯酒千鍾)’이라고 하여 요 임금이 천 잔의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요 임금이 술을 즐겼다고 인식하였으며,
아울러 그 당시의 백성들도 태평을 구가하면서 술을 즐겼다고 보았다.
북두는 북두칠성의 머리부분이 형성하는 국자 모양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술잔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樓前舜樂動南薰(누전순악동남훈)
누각 앞의 순 임금 음악은 남쪽 훈풍 불어오게 하네.
누각 앞에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순 임금의 음악을 연주하니 거기에 맞추어 남쪽에서 따뜻한 훈풍이 불어온다고 하여,
지금의 정치도 순 임금 시대처럼 잘 이루어지는 태평시대라는 것을 표현하였다.
‘남훈(南薰)’은 원래는 남쪽의 훈풍을 뜻하지만,
순 임금이 지었다는 남풍시(南風詩)의 악곡(樂曲)인 「남훈가(南薰歌)」를 가리키기도 한다.
옛날에 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원망을 풀어 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순 임금의 「남훈가」는 ‘요 임금의 술잔’과 더불어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말로 흔히 사용한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인 왕유의 칠언 율시 「대동전주산옥지 용지상유경운 신광조전 백관공도 성은편사연악 감서즉사
(大同殿柱産玉芝, 龍池上有慶雲, 神光照殿, 百官共覩, 聖恩便賜宴樂, 敢書● 事)」중 제6구이다.
天門日射黃金榜(천문일사황금방)
황궁(皇宮) 문엔 햇빛이 황금 편액을 비추고,
春殿晴曛赤羽旗(춘전청훈적우기)
봄 전각엔 저녁 해가 적우기(赤羽旗)를 비추네.
이 시구가 실린 시는 두보가 문하성(門下省)에서 퇴근하여 선정전(宣政殿)을 나서면서 지은 작품이며,
이 구절은 저녁 빛을 받고 빛나는 궁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원래 시의 제목은 「선정전퇴조 만출좌액(宣政殿退朝 晩出左掖)」이며 이 두 구는 수련(首聯), 즉 1, 2구에 해당한다.
1구에서 ‘榜(방)’은 ‘膀(방)’과 통용되며 여기서는 편액(匾額)을 뜻한다.
2구에서 적우기는 붉은 깃발, 또는 붉은 새의 깃털로 만든 깃발을 말한다.
雙闕瑞煙籠菡窞(쌍궐서연농함담)
대궐의 상서로운 연기는 연꽃을 감싸고,
九城初日照蓬萊(구성초일조봉래)
도성(都城)의 아침 해는 봉래궁(蓬萊宮)을 비추도다.
아침에 대궐 안에 상서로운 연기가 가득 끼어 연못의 연꽃을 감싼 모습과
서울 장안에 아침 해가 떠올라 봉래궁을 비추는 풍경을 묘사하였다.
‘쌍궐(雙闕)’은 옛날에 궁전이나 사당 등의 정문 양쪽에 높은 누관(樓觀)을 세운 것에서 유래하여 궁궐의 문, 또는 궁궐을 가리킨다.
‘구성(九城)’은 서울을 뜻하고 ‘봉래(蓬萊)’는 원래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 이름이나
여기서는 궁전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봉래궁은 대명궁을 고쳐 부른 이름이다.
당나라 문인 양거원(楊巨源, 755~?)의 「조조(早朝, 이른 아침)」중 함련 즉 제 3, 4구에서 따온 구절이다.
문헌에 따라 ‘서연(瑞煙)’은 ‘박연(薄煙)’으로 된 곳도 있다.
碧簫雙引鸞聲細(벽소쌍인란성세)
벽옥(碧玉) 퉁소 쌍으로 끄니 난새 소리 가느다랗고,
두 사람이 푸른 옥[碧玉]으로 만든 퉁소를 불어대니 그 소리가 고운 난새 소리처럼 가느다랗게 흘러 퍼진다는 뜻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난새는 봉황의 일종으로 원앙처럼 암수가 짝을 지어 다닌다고 여겨진다.
이른 아침 조회에서 궁중 악사 두 사람이 암수의 난새 울음처럼 고운 화음으로 퉁소를 부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綵扇平分雉尾齊(채선평분치미제)
고운 부채 반으로 나뉘니 치미선(雉尾扇)이 가지런하네.
치미선을 든 의장대가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으니 부채들이 늘어선 모양이 가지런하게 정돈돼 보인다는 뜻이다.
궁중의 엄숙하고 정연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치미선은 임금이 쓰던 의장용(儀仗用) 부채의 일종으로 꿩의 깃으로 만들었다.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봉천전조조(奉天殿早朝, 봉천전의 이른 아침)」이수(二首) 중 둘째 수의 함련 제 3, 4구이다.
옥호루(玉壺樓)
곤녕합에 부속된 건물로서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같은 누각의 이름이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궁중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옥호루를 1909년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할 때 헐어버렸다.
2006년 건청궁 일대를 복원하면서 함께 복원되었다.
‘옥호(玉壺)’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옥호빙(玉壺氷)’의 준말로 ‘옥병 안의 얼음’이라는 뜻을 갖는다.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왕창령(王昌齡, 698~755)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며)」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寒雨連江夜入吳 찬비 줄곧 강에 내리는데 밤에 오(吳) 땅에 들어와
平明送客楚山孤 아침에 손님을 보내자니 초산(楚山)이 쓸쓸하네.
洛陽親友如相問 낙양의 친구들이 만약 소식을 묻거든
一片氷心在玉壺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이 옥호(玉壺)에 있다 하소.
왕창령이 친구인 신점(辛漸)을 낙양으로 떠나보내면서 지은 이별의 노래인데,
자신의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얼음과 옥병에 비유했다.
현재의 현판은 복원하면서 새로 단 것이다. 원래의 현판이 사진으로 전한다. 글씨는 초서체(草書體)이다.
사시향루(四時香樓)
곤녕합 남루(南樓)의 동쪽에 있다. 장안당에 추수부용루가 있는 것과 비교된다.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어지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의미이다.
여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녹금당(綠琴堂)
복수당 서행각에 있는 건물이다.
‘녹금(綠琴)’이란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이다.
푸른 숲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거문고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정시합(正始閤)
곤녕합의 동북쪽에 붙어 있는 침방(寢房)이다.
‘정시(正始)’는 ‘처음을 바르게 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처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인륜의 시작을 부부관계로 파악하고 그 관계를 바로 잡음을 가리킨다.
「모시서」에서는 “「주남」과 「소남(召南)」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正始] 도이며, 왕화(王化)의 기틀이다.”라고 하였다.
곧 『시경』의 「주남」편과 「소남」편이 부부 관계의 도리를 바르게 드러내는 시편이라고 본 것이다.
주희는 이에 덧붙여 “임금의 도는 집안에서 시작하고 천하에서 마무리되는데,
「주남」과 「소남」은 집안을 바로잡는 일을 담고 있다.
임금의 교화는 반드시 법도가 창성하고 예악이 갖추어지며
아름답게 칭송하는 노래 소리가 만들어진 뒤에야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이 없으면 무엇으로 이를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집안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앞섬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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