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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 - 석모도(席毛島)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7. 12. 6. 22:30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 - 석모도(席毛島)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선덕여왕 4) 4,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천인대(千人臺)는 길이 40m,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 (매음리) 보문사

     

     

     

    보문사 일주문(普門寺 一柱門)

     

    보문사의 일주문은 마을이 있는 절 입구 주차장에서 민가와 상가들을 지나서 100m를 올라오면 만날 수 있다.

    일반적인 건축물의 형태는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리는 것인데,

    일주문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일주문이라 불린다.

    일주문은 문 밖의 사바세계와 문 안의 부처님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일심(一心)의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성불하라는 큰 뜻이 있다.

    보문사 일주문은 칸수는 한 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현판에 쓰여진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는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작품이다.

     

     

     

     

     

     

     

    사찰내 전통찻집 '감로다원(甘露茶園)'

     

     

     

     

     

     

     

    오백나한(五百羅漢)

     

    천인대(千人臺)는 길이 40m, 5m의 큰 바위로 창건 이후로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그 크기가 넓어서 천명이 앉을 수 있다하여 '천인대'라 이름 붙여졌다.

    오백나한은 2009년 와불전과 함께 천인대에 조성되었다.

    전신사리가 봉안된 33관음보탑을 중앙에 두고 오백나한이 감싸는 형상이다.

    나한은 부처님이 제자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존자(尊者)를 말하며, 해탈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보문사의 오백나한상은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나한님의 좌대에는 봉안에 동참하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법음루(法陰樓)

     

    법음루에는 불교 사물(四物) 중에서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이 있고,

    법음루 옆에 위치한 범종각(梵鐘閣)에는 별도로 '범종(梵鐘)'이 설치되어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졌으며, 제작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正秀)스님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는 5톤이나 된다.

    이 범종은 1975년에 육영수여사가 화주하여 모셔진 것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조성 당시 국내 최대 규모로 나라 안팎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범종의 기본 형태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종각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朴世霖, 19241975)의 작품이다.

     

     

     

    윤장대(輪藏臺)

     

    책장의 일종으로 경전을 넣고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정은 경장(經藏)뿐 아니라 율()과 논(),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疏)도 함께 넣어둔다.

    또한 불도를 믿으려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한다.

    더불어 경전을 넣고 돌리면서 소원을 빌거나 소원을 써서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는 등 소원을 빌 때 사용한다.

    윤장대는 중국 양나라의 선혜(善慧)선사가 글자를 모르거나 경정을 가까이 할 시간이 없는 중생을 위해 만든 것이다.

     

     

     

     

    보문사 극락보전(普門寺 極樂寶殿)

     

    보문사의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은 정면 5, 측면 3칸에 내부 60평 정도의 웅장한 규모로 1972년 정수스님이 중수하였다.

    상단에는 아미타불과 좌우협시로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이 있고, 중단에 신중탱화가, 하단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또한 상단 뒷편으로 총 3,000분의 목부처가 모셔져 있어 법당의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삼존불 위로는 아름다운 닷집이 조성되어 있으며, 천정의 좌우에 각 하나씩 용상(龍像)이 지나다니고,

    또 다른 한 쌍의 용상이 전각의 안에서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전각의 출입문은 채색된 꽃 무늬의 문살로 단순한 가운데 소박한 멋을 더하고 있다.

     

     

     

     

     

     

     

     

    보문사 삼성각(普門寺 三聖閣)

     

    삼성각은 나한전 석실과 극락보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60년에 지어졌으며 최근에 중수되었다.

    정면 3,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 넓이는 처음 지어질 당시는 4평이 조금 못되었으나 지금은 조금 더 확장되었다.

    위치는 경내보다 높게 축대를 이중으로 쌓아 자리하고 있으며 돌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계단 옆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 2기가 양쪽으로 있다

    전각의 안에는 불단단은 놓여 있으나 불상 없이 가운데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불단에 모셔진 칠성탱화 등은 모두 1992년에 봉안된 것이다

    삼성각 양쪽 내벽에 나한도가 각각 걸려있고 바깥쪽 벽 좌우에도 산신도, 나한도 4폭이 그려져 있고,

    정면 기둥에는 오른쪽부터 '영과광대혜감명(靈過廣大慧鑑明)', '나열벽천임찰토(羅列碧天臨刹土)',

    주천인세수막장(周天人世壽莫長)'이라 쓴 주련(柱聯)이 각각 걸려 있다.

     

     

     

     

    보문사 석실(普門寺 石室)

     

    신라 선덕여왕 4(635)에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1812)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사원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龕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 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보문사 와불전(普門寺 臥佛殿)

     

    와불전은 오백나한과 함께 천인대(千人臺)에 조성된 전각이다.

    열반 당시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을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여 모셨으며, 전체 신장 10m, 열반대는 12m로 그 규모가 크다.

    전각 내부는 부처 뒤로 공간이 있어 주위를 돌면서 참배를 할 수 있다

    부처가 누워 있는 모습과 손의 모양, 불의(佛衣)의 주름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운양이 새겨진 열반대는 구름의 모양이 수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보문사 와불(普門寺 臥佛)

     

    와불전의 와불은 열반하는 부처의 누워있는 형상으로 보문사의 와불 부처는 너비 13.5m, 높이 2m이다

    아난에게 사라(Sara)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하라고 이르고 부처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웠다.

    그리고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나는 이제 팔십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제자를 돌아보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위와 같이 부처가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기 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더 풀어 쓰면,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 제행무상 불방일정진(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겼다.​​

    이 말씀을 마치고 부처는 평안히 열반에 들었다. 이 날이 부처께서 80세 되던 해 215일 야반(夜半)이었다.

     

     

     

     

     

     

     

     

     

    큰 상처를 입은 소나무

     

    보문사 진입로에는 소나무에는 일제강점기 때 소나무 송진 채취 흔적이 생채기로 남아있다.

    비행기 등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소나무에 흠집을 내어 전쟁물자인 송탄유(松炭油)를 제조한 것이다.

     

     

     

     

     

     

     

     

     

    보문사 관음송(普門寺 觀音松)

     

    수종 : 소나무

    수령 : 200

    이 나무는 수령이 200년 이상된 소나무로써 옆으로 누운 듯 뻗어 잘 발달되어 있다.

    암반 위에 뿌리를 내리고 200년을 보문사의 입구를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보호수(부락의 평화나무)

     

    수종 : 소나무

    수령 : 215

    옛날부터 동네 노인들이 장기를 두며 여가를 보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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