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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정호수 둘레길
    국내 나들이/호수,저수지(湖水,貯水池) 2018. 5. 29. 04:30

    산정호수 둘레길




    낙천지폭포(樂天地瀑布)


    산정호수에서 자연암반으로 흘러내리는 높이 30m 너비 15m의 낙천지폭포는

    부소천(釜沼川)으로 유입한 후 한탄강(漢灘江)으로 합류한다.





















    명성산(鳴聲山, 923m)

    궁예(弓裔)가 우니 산새들이 같이 울었다는 산






    망봉산(望峰山, 363m)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에게 쫒겨와 망을 보던 봉우리







    망무봉(望武峰, 440m)

    왕건(王建)의 침입을 궁예(弓裔)에게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봉우리




    궁예(弓裔) - 후고구려의 시조

     

    ?~ 918(고려 태조 원년)

    후고구려의 왕(901년~918년 재위)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혹은 신라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

    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지금의 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













    月虹誕生(월홍탄생)


    궁예는 신라의 제48대 왕인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성여왕의 외할아버지인 헌안왕의 아들이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5자가 거듭된 단오날(55)에 후궁에 의해 태어난 궁예는 태어날 당시

    궁궐 지붕에는 긴 흰무지개가 하늘높이 드리웠고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나 있었다.

    모함을 계획한 왕비는 일관을 시켜 이는 변괴라 하여 장차 나라에 이롭지 않는 일이 생길까 두려우니

    마땅히 기르지 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뢸 것을 권하게 된다.

    왕은 고민끝에 태어난 아기를 즉시 내다버리도록 명했고 버려진 과정에서 아기는 정자에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한 시녀가 받아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이 아기의 한쪽 눈을 찌르게 되었다.

    이때 궁예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시녀는 아기를 안고멀리 산골짝으로 달아났다.




    궁예의 눈물(궁예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月虹誕生(월홍탄생)

    궁예는 신라의 제48대 왕인 견문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성여왕의 외할아버지인 헌안왕의 아들이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5자가 거듭된 단오날(55)에후궁에 의해 태어난 궁예는 태어날 당시 궁

    궐 지붕에는 긴 흰무지개가 하늘높이 드리웠고 태어나면서 부터 이()가 나 있었다.

    모함을 계획한 왕비는 일관을 시켜 이는 변괴라 하여 장차 나라에 이롭지 않은 일이 생길까 두려우니

    마땅히 기르지 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뢸 것을 권고한다.

    왕은 고심끝에 태어난 아기를 즉시 내다버리도록 명했고 버려진 과정에서

    아기는 정자에서 잘못하여 손가락이 아기의 한쪽 눈을 찌르게 되었다.

    이때 궁예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시녀는 아기를 안고 멀리 산골짝으로 달아났다

     

    靑年弓裔(청년궁예)

    17년이 지나 청년이 된 궁예는 유모인 어머니로 부터 자기가 왕족의 아들인 것과 지난 과거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된다.

    지난 과거를 들은 궁예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고 어머니 곁을 떠나 학문을 익히고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세달사(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지금의 홍교사)라는 절에 들어간다.

    허공스님은 궁예를 보자마자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법명을 착할 선() 마루종()자를 써서 선종이라 불려지게 된다.

    학문과 무술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닦았으며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설움에 빠진 궁예는

    자신의 진로를 위해 세달사를 떠나게 된다.

     

    彌勒佛(미륵불)

    임금이 된 궁예는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자기를 버린 신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광기를 부리곤 했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날의 겸손함과 명석함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해서 신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궁예는 이미 예전의 궁예가 아니었다.

    우울증과 광기가 심해 사람을 의심하고 성격마저 포악해졌다.

    거기다가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부처님이 내려와 백성을 잘 다스려 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했다.

     

    驕奢淫佚(교사음일)

    궁예는 점차 타락의 길로 빠져 들게 된다.

    밖으로는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나주등을 점령하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호화스러운 황궁을 짓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잃어 가게 된다.

    그리고 누구든 뜻을 거스리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으면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말리는 왕후와 두 왕자를 처참하게 죽일 정도였다.

    궁에의 이런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심적 불안으로 인해 점차 몰락의 길로 빠져 들게 된다.

     

    弓裔逃隱(궁예도은)

    궁예가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잃어가고 있을 때 신하들이 뜻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여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처음에 망설였던 왕건은 불의를 치는 것은 반역이 아님을 깨닫고 의연이 이를 받아 들인다.

    이 사실을 들은 궁예는 옷을 바꾸어 입고 명성산으로 도망치게 된다.

     

    弓裔粉骨(궁예분골)

    명성산으로 도망친 궁예는 이틀밤을 숨어 지냈다.

    그러나 배가 고파 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마을로 내려와 보리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러던중 농부에게 신분이 들러나 병사들에게 붙잡히게 되고 왕건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가 서기 918년 봄이었다.

    궁예는 그가 세운 왕국과  함께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산정호수(山井湖水)

     

    산 속의 우물(산정, 山井)이라는 뜻을 가진 산정호수(山井湖水)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봉우리가 호수에 그림자로 드리우면 한 폭의 산수화를 옮겨 놓은 듯 하며,

    아름다운 물길과 소나무숲길이 함께 펼쳐져 있어 한국관광 100선으로 손꼽힌다.

    북쪽은 궁예(弓裔)가 우니 산새들이 함께 울었다는 명성산(鳴聲山, 923m)

    남쪽에는 관음산(觀音山, 733m)이 높이 솟아 있고,

    서쪽은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쫒겨와 망을 보던 망봉산(望峰山, 363m)

    왕건의 침입을 궁예에게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봉우리 망무봉(望武峰, 440m)

    호수를 둘러싸고 있어서 맑은 계류가 호수로 모여든다.

    1925년 농업용수용으로 만든 산정호수는 19773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해마다 수 많은 관광객이 찾으며,

    경관이 수려한 수변으로는 약 4km(수변코스 2.6km, 궁예코스 1.4km)의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호수 주변에는 궁예가 망국의 슬픔으로 산기슭에서 터뜨린 통곡이 산천을 울렸다는 전설이 서린

    명성산”(鳴聲山, 일명 울음산”)이 있으며, 이 산 정상부근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 10만평의 억새밭이 있어

    매년 10월에는 억새꽃의 은빛장관을 알리는 억새꽃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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