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율곡이이 묘(栗谷李珥 墓)와 정경부인 곡산노씨묘(貞敬夫人 谷山盧氏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8. 6. 3. 20:26

    율곡이이 묘(栗谷李珥 墓)와 정경부인 곡산노씨묘(貞敬夫人 谷山盧氏墓)









    문성공 율곡 이선생지묘(文成公 栗谷 李先生之墓)

    정경부인 곡산노씨묘 후재(貞敬夫人 谷山盧氏墓 後在)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判官) 의석(宜碩)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 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烏竹軒)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중종 38)8세때 화석정시(花石亭詩)’

    1545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1548(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1551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하였고 1557(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7월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형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율곡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 대동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4(선조 17) 음력 116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 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1624(인조 2)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숙종 7) 문묘에 배향 되었다




    율곡이이 묘(栗谷李珥 墓)와 정경부인 곡산노씨묘(貞敬夫人 谷山盧氏墓)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한 이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사창(社倉)의 설치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저서로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있으며,

    대사헌을 비롯하여 대제학,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이는 유학에 있어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이황과 서경덕의 설을 절충하여

    일원론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고, 기호학과를 형성항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떠난 후 이곳 파주 자운산(紫雲山) 선산에 묻혔는데, 묘역은 부인 곡산노씨 묘와 위 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봉분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해 있으며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세웠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