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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 - 사적 제480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6. 24. 22:30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 - 사적 제480



    한남루(漢南樓)


    한남루는 상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의 누각이다.

    정조 22년에 광주유수(廣州留守) 홍억(洪檍)이 행궁 입구에 한남루라는 누문을 대문으로 세웠으나 20세기 초반에 붕괴되었다.

    '한남루'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樓臺)라는 뜻이며,

    프랑스 영사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2011년 같은 위치에 한남루를 복원하였다.









    좌전(左殿)


    남한산성행궁은 다른 행궁과는 달리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해당하는 좌전(左殿)이 있다.

    좌전 권역은 유사시에 서울 종묘에 모신 역대 임금의 신주를 옮겨 보관하도록 한 공간으로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이는 남한산성행궁은 단순한 행궁이나 임금의 피난처가 아닌 임시 도읍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전은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로 부르기도 한다.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외행전(外行殿)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 3(1625)에 준공되었다.

    정면 7,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142)이 내행전(167) 보다 작고, 내행전에 비해 6m 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犒饋)를 이곳에서 행하였으며,

    한봉(漢峯)에서 청나라 군이 홍이포(紅夷砲)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重建)된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일장각(日長閣)


    일장각은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淸凉山)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日長山)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내부담장 밖에 있었던 여러 건물 중 하나로써,

    순조 29(1829)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李止淵)이 세운 건물로,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다.

    현재 일장각은 2010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내행전(內行殿)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인조 2(1624)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 측면 4칸으로 전체 28(167)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을 되어있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대청을 제외한 3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내행전의 기동 위쪽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돌을 3단 쌓아 경사가급하고 평지가 협소한 약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장엄한 외관과 안정감을 주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에는 용문양과 봉황문양의 막새기와를 사용하였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에 중건(重建)되었다.

     








    재덕당(在德堂)


    재덕당 숙종 14(1688)에 광주부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다.

    내행전의 후면부에 보다 높은 위치에 건립하였고, 명칭과 내부시설로 볼 때,

    좌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왕의 수신 공간 내지는 제서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 측면 3칸의 9칸 건물이다.




    반석(磐石)


    재덕당在德堂) 옆에 큰 돌에 금석문으로 새겨진 반석은 튼

    튼한 반석 위에 종묘사직을 세우겠다는 인조 임금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좌승당(坐勝堂)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의 밖에 있었던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1817) 광주부 유수 심상규(沈象奎)가 건립하였다.

    좌승(坐勝)이란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지가 담겨있다.

    좌승당은 발굴조사를 거쳐 정면 6, 측면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2002년에 중건(重建)되었다.









    이위정(以威亭)


    이위정은 좌승당(坐勝堂) 뒤편 후원에 2010년 중건되었다.

    순조 17년 광주부 유수부 심상규(沈象奎)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위(以威)’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임금님의 임시 거처(居處)


    행궁(行宮)은 왕이 항상 기거하는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이다.

    행궁제도는 그 역사적 기원이 매우 오래되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여러가지 목적에 따라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다.

    강화행궁(江華行宮), 광주행궁(廣州行宮), 양주행궁(陽州行宮), 전주행궁(全州行宮)이 그 예로,

    이들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과 왕실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이다.

    임금의 이동은 질병 치료와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온천이 있는 온양, 이천, 고성과 초수(椒水 : 냄새가 후추와 같고, 씻으면 안질이 낫는다고 알려진 물)가 난다는 청주,

    목천, 전의에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다.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 - 사적 제480


    남한산성행궁은 다른 행궁과는 달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갖추고

    도성의 궁궐을 대신한 피난처가 있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유일하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 2(1624) 7월에 착공하여 인조 4(1626) 11월에 완공되었다.

    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지로 조상들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머물렀다.

    남한산성행궁은  1909년까지 잘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1919년 행궁에 있던 좌승당(坐勝堂)을 경안리(京案里)로 옮겨 경찰서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지속적인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內行殿)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2004년 좌전 등을 중건하였으며, 200768일 남한산성행궁을 사적 제480호로 지정하였다.

     



    세계유산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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