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30. 03:07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공산성 비석군(公山城 碑石群)


    공산성 금서루 입구에는 47개의 비석이 일렬로 정리된 채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들은 공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로 이들의 벼슬과 행적 등이 비석에 새겨져있다.

    이들 비석은 본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종래 공주 시내의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한 것이다.

    비는 공주 지역과 관련된 우의정(조두순), 도순찰사(정태화, 민영상, 민치상, 김응근, 남일우, 조득림),

    관찰사(심의면, 김병시, 심의신, 조병현, 이겸재, 이은우, 김주근, 신의, 한상국, 이형덕), 암행어사(이범조),

    목사(김효성, 박병), 판관(송병종, 민두호, 민치서, 윤치응, 이원필, 이문영, 조병노, 김윤환), 군수(심건택),

    우영장(정지현, 조희철), 중군(조겸희, 최관석, 임주환, 조병완) 등의 송덕비 혹은 공덕비가 대부분으로

    조선시대 일반적 비석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귀부와 이수를 모두 갖춘 것은 순찰사 정태화의 비뿐이다.

    공덕비 이외의 비로는 제민천교명 제민천교영세비가 있으며,

    이들이 세워진 시기는 구체적으로 확인이 어렵지만 공주 시내 중심을 관통하여 흐르는

    제민천의 교량을 건설한 1818년대로 추정되며, 비는 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공산성(公山城)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앞면 3, 옆면 1칸 규모로 지어졌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금성동)  




    공산성 깃발이야기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 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동쪽에는 청룡(靑龍), 서쪽에는 백호(白虎), 남쪽에는 주작(朱雀), 북쪽에는 현무(玄武)를 각각 배치하였다.




    공산성(公山城) - 사적 제12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도성 안에 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1624) 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왕궁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201578"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