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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 고분군(世界遺産 百濟歷史遺蹟地區 宋山里 古墳群)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28. 20:29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 고분군
(世界遺産 百濟歷史遺蹟地區 宋山里 古墳群)
웅진시대의 시작과 송산리 고분군(宋山里 古墳群)
백제의 22대 문주왕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서울)이 함락되자 웅진(공주)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이후 26대왕인 성왕이, 538년에 다시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들은, 바로 웅진 도읍기에 재위했던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현재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해발 130m의 나지막한 송산(宋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한다.
현재 이 고분군에는 7기의 고분이 있는데,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동북쪽으로 1~4호분이 있고,
아래쪽으로 무령왕을 포함해 5호분과 6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도 웅진시기 백제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했었는데,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웅진백제 왕릉원임이 보다 확실해졌다.
송산리 고분군 발굴과정(宋山里 古墳群 發掘過程)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7기 중 1~4호분은 1927년에 발견되었다.
4기 모두 백제의 굴식돌방 무덤으로 발굴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도굴이 진행되었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고 1~4호분으로 명명되었다.
발굴 당시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5호분은 1932년에 앞서 발굴한 4기의 고분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위해 관람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 역시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1호분~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돌방 무덤이고 벽돌로 만든 관대가 2개 남아 있으며,
입구에서 방에 이르는 널길이 우측에 붙어있다.
5호분도 부실한 조사와 도굴 등으로 인해 약간의 금.은제 장신구와 그리고 토기, 철제 유물 등이 남아있다.
6호분은 1932년에 일본인 가루베지온(輕部慈恩, 1897~1970)이 발견, 발굴하였는데
공식적인 조사는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사신도로 유명한 6호분은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규모가 무령왕릉에 필적할 정도지만
이 또한 잘못된 발굴과정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에는 6호분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주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 도굴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 왕릉은 1971년 여름 장마철에 5호분과 6호분에 스며드는 물기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4,600여 점 이상에 이르렀는데
그 하나 하나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또한 무덤 속에서 나온 묘지석으로 인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反響)을 일으켰으며,
백제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이고 나아가 새로운 백제사 연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6호분의 가장 큰 특징은, 벽돌무덤으로 고구려와 같은 사신도 있다는 점이다.
무덤 내부는 길이가 3.7m, 폭이 2.2m이고 천장은 터널형이다.
구릉 상부 쪽에 묘광을 파고 벽돌로 전체를 축조하였으며,
벽면은 중국 돈 오수전 무늬의 벽돌이고 가로와 세로 쌓기를 반복해서 쌓아 올렸다.
또한 동벽과 서벽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燈龕)이 각각 3개씩이고, 북벽에 1개가 있다.
동감 바로 위에는 가창(假窓)이 있어 마치 집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무덤은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송산리 벽화 고분이라고도 한다.
벽면에 사신도를 그리는 방법은 벽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먼저 그림을 그릴 부분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개를 태운 호분(胡粉)으로 그렸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남벽에는 주작, 북벽에는 현무를, 그리고 남벽의 주작 좌우에는 해와 달, 구름을 묘사했다.
이 6호분의 사신도는 웅진시대 유일한 벽화이자 부여 능산리 동하총 벽화와 함께 백제의 대표적 고분 벽화이다.
6호분도 도굴과 잘못된 발굴로 인해 아쉽게도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널방에는 관대가 1기만 남아 있어 한사람만 안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왕과 관계가 깊은 인물로 보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동성왕으로 보기도 하고, 무령왕의 전 왕비로 보기도 한다.
살아있는 무령왕릉(武寧王陵)
무령왕릉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놀라며 주목한 것은 무덤 앞에 놓여 있던 지석(誌石)이었다.
이 2매의 지석은 삼국시대의 여러 왕릉급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된 것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의 지석에는 묘지와 방위도가, 왕비의 지석에는 묘지와 매지문(買地文)이 새겨져 있다.
지석의 내용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뜬 날짜와 장례 절차에 관한 것이며,
왕비의 지석에 쓰여진 매지권은 땅의 신들에게 묘를 조성할 토지를 사들인다는 내용이다.
무령왕릉(武寧王陵)
왕릉의 구조를 크게 나누면,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과 부부를 모신 널방으로 나뉜다.
널길은 남북길이가 2.9m, 동서너비는 1.04m,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는 1.45m이다.
천장의 모습은 반원형의 터널형태, 즉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은 길이가 4.2m, 너비가 2.7m이며, 왕 부부가 모셔진 관대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m이다.
특히 무덤방의 북쪽 벽과 동서 양쪽 벽에는 모두 5개의 보주형(寶珠形) 등감(燈龕)이 설치되었다.
등감에는 등잔이 놓여 있고, 그 등잔에는 심지자국이 남아 있어 무덤 내의 조명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내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널길과 널방을 구분하는 공간이 배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마치 가옥의 현관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주는 곳으로 너비는 1.10m 정도이며, 0.15m 깊이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무령왕릉은 백제시대의 건축 수준, 나아가 예술적 감각이나 사상적 배경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산리 제1~4호분(宋山里 第1~4號墳)
1927년에 조사된 4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횡혈식석실분)으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처음 발굴된 유적이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
무덤은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널방의 바닥에서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송산리 5호분(宋山里 5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횡혈식석실분)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널방은 돌을 쌓아 만들고 관받침대는 전을 이용하였다.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다.
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塼築墳, 전축분)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널방은 동전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다.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양나라 관청용 기와를 모델로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명문 내용이 확인되어,
벽돌제작에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 - 사적 제13호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의 경계에 있는 송산(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dome)형태로 둥글게 마무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의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百濟歷史遺蹟地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王都)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공주) 시기 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사비(부여) 시기 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사비 시기의 수도인 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조성된
복도(複都)와 관련된 유적인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종교 등을 받아 들여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OUV)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8일, 독일의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전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하면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이바지한 백제의 역할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세계유산 등재 기준
(ⅱ) 특정기간, 지역 내 중요한 인류 가치 교류의 증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적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 존재하였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간에 진행된 건축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가져온 교류를 보여준다.
(ⅲ)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수도 입지 선정을 통해서 백제의 역사를, 불교 사찰을 통해 백제의 내세관과 종교를 성곽과 건축물의 하부구조를 통해
독특했던 백제의 건축 기술을, 고분과 석탑을 통해 백제 예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있다.
이러한 유산들은 사라져 간 백제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이 되기까지
2010.01.11 백제역사유적지구 잠정목록 등재
2011.02.08 백제역사지구 우선 추진대상 선정
2014.01 등재신청서 유네스코 제출
2014.09 이코모스(ICOMOS) 현지실사
2015.07.08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이코모스(ICOMOS) : 국제기념물위원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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