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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 홍주의사총(洪城 洪州義士塚) - 사적 제431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2. 9. 04:30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 - 사적 제431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항일구국운동 가운데

    규모가 크고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였던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63월 이조참판을 지낸 민종식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은 홍주읍성을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르지 못하였다.

    같은 해 59일 홍산(현 부여군 내산면)에서 다시 일어나 서천, 비인, 남포, 결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홍주 삼신당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기며, 20일 홍주읍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이 본격화 되면서 531일 새벽 동문에 이어 북문이 폭파되고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홍주의병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홍주읍성에서 물러났다.

    이때 홍주읍성과 홍성천 주변에 흩어져 있었던 의병들의 유해는 1949년 이후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현재의 홍주의사총에 봉안되었다.

    홍양일기’, ‘홍양기사등의 자료에 따르면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는

    최소 80여명 이상, 최대 수백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성역화가 추진되어 지금은 중앙에 의사총을 중심으로 동쪽에 창의사,

    북쪽에 숲길(탐방로)과 홍주의병기념탑 등이 조성되어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창의문(倡義門)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亂義兵將士公墓碑)










    진충문(盡忠門)




    창의사(倡義祠)






    홍주성전투




    홍주의병들 홍주성을 탈환하다.




    홍주의병들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다.




    홍주의병들 홍주성으로 향하다.




    을사늑약 이후 의병봉기를 논의하다.




    홍주의사총 성역사업조성기(洪州義士塚 聖域事業造成記)


    악랄(惡辣)한 일본군(日本軍) 배일노선(排日路線) 고수(固守)하던 국모(國母)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고

    이어 단발령(斷髮令)의 강행(强行)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締結)로 민심(民心)이 날로 흉흉(洶洶)해지자

    이에 분개(憤慨)한 홍주(洪州)고을 충의열사(忠義烈士)들이 분연(憤然)히 창의봉기(倡義蜂起)하였으니

    이는 조선조말(朝鮮朝末) 주권회복(主權恢復)을 선도(先導)한 항일의병(抗日義兵)의 시초(始初)였다.

    구국일념(救國一念)에서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항전(抗戰) 하였으나

    1906년 병오(丙午) () 49일 여명(黎明)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순의(殉義)하였으니

    산천(山川)도 경탄통곡(驚歎痛哭)할 참사(慘事)였다.

    900여 의사공(義士公)들의 시신(屍身)은 구국(救國)의 원한(冤恨)도 풀지 못한 채 산격(散骼) 위에

    서린(墅㷠)만 오가는 음곡(陰谷)에서 40여년간 풍상설한(風霜雪寒)에 폭로(曝露)되었으니

    진실(眞實)로 가슴을 외이는 통한(痛恨)이었다.

    민족(民族)이 있어도 강토(疆土)가 없었던 왜정(倭政) 때에는

    산화(散華)한 선열(先烈)들의 유해(遺骸)를 수묘(修墓)할 겨를 조차 없었다가

    8.15광복(光復)을 맞아 산재(散在)한 황예(荒瘞)를 수심(搜尋)하여 심감합장(心坎合葬)의 예()를 갖춘 후,

    사당(祠堂)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900의사총(九百義士塚)이라 하였다.

    199112월 총 37억원의 재원을 마련 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묘역정비(墓域整備), 사당보수(祠堂補修),

    석물조성(石物造成), 삼문신축(三門新築)과 부속공사(附屬工事)까지 완성(完成)하여 말끔히 단장(丹粧)하고

    이 성역(聖域)을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이라 개칭(改稱)하였다.

    역사적인 사업은 살신(殺身)으로 호국(護國)한 영령(英靈)들의 넋을 영원(永遠)히 애도(哀悼)하고

    그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계승(繼承)함으로써 만세(萬世)토록 호국(護國)할 수 있는 충절(忠節)의 지표(指標)가 될 것이다.

    19921230일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亂義兵將士公墓碑)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불평등한 조약 내용에 분노한

    성재한(成載翰), 채광묵(蔡光墨), 서기환(徐基煥) 등은 의병을 이끌고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190649일에 홍주성이 함락되고, 모든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병오의거(丙午義擧)라 하고 병오년에 전사한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19497월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앞면에는 1906년 당시의 청주성 전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지었고, 심상직(沈相直)이 글씨를 썼다.





    홍성 홍주의사총 관리사무소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


    홍주의사총은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명의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지입니다.

    이 무덤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의미에서 처음에 구백의총이라고 하였다가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면서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매년 530일에는 의병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냅니다.

    홍주의사총 오른쪽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의 영혼을 모신 창의사가 있습니다.

    1971년 세워진 이 사당은 1991년 새롭게 지어졌고,

    이때 한글학자 한갑수선생이 창의사와 창의문 현판 글씨를 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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