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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좌진장군 생가터, 백야공원(白冶公園)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8. 12. 10. 23:00

    김좌진장군 생가터, 백야공원(白冶公園)









    유년의 꿈


    1889(고종26)부터 1930.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홍성 출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고 틈틈이 병법에 관한 서적을 읽기도 하였으며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즐겼다.




    해방의 실천


    1905년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 30여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해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임관 직후인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깨움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敎)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게 하였으며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또한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敎)를 설립하였다.  




    진격


    1911년 독립군사관학교 설립자금 모금 중 투옥. 2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19209월 제1회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였다.

    1920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대부대 3,300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림으로써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우고 그해 12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광복의 아침


    1925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였으며,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던 중

    1930124일 만주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어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장군(金佐鎭 將軍, 1889~1930)


    독립 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 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種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6개월 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鱗), 신현대(申鉉大),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등 애국 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미 결성된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고,

    1920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 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천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大戰果)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다.

    1925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집행위원장으로써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30124일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행산리사(杏山里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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