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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9. 1. 22. 04:35

    제7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


    매년 1월 중순에 한탄강 현무암 협곡 트레킹을 주제로 기암절벽과 주상절리 등

    생태가치가 우수하고 경관이 수려한 자연을 한탄강을 따라 강 위를 걸으며 볼 수 있는 '동지섣달 꽃 본 듯이'

    7회 철원 한탄강 얼음 트레킹축제가 20191. 19 ~ 1. 27까지 강원도 철원 한탄강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겨울철 탐방코스는 한탄강 태봉대교를 출발하여 송대소, 마당바위, 승일교(한탄대교)를 경유하여 고석정까지 이어지는 6km구간이다.

    승일교 주변 행사장일대에서는 눈썰매, 개썰매 체험, 열기구, 연날리기와 대형 얼음조각, 눈조각, 이글루 등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어 전국에서 유일한 얼음트레킹 행사로 자연이 주는 감동까지 더하여

    겨울철 대표적인 지역축제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2002년 5월 27일 등록문화재 제26호로등록된 승일교














    한탄강 고석정(漢灘江 孤石亭)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이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m 높이의 기암의 양쪽 사이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고석정(孤石亭)은 신라 진평왕 때 한탄강 중류에 10평 정도의 2층 누각을 건립하여 고석정이라 명명했다 하며,

    이 정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고석정은 신라 때 진평왕이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고석정이 더욱 유명해진 까닭은 조선시대 명종때 임꺽정(林巨正, ?-1562)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철원은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현무암 분출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로서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한탄강이 흐르면서 침식활동을 통해 곳곳에 화강암의 주상절리(柱狀節理)와 수직 절벽을 이루었다.

    추가령구조대의 중심에 위치하여 후에 경원선의 통과지가 되기도 한 철원은 임꺽정 생애 중에도

    칩거하기 좋은 장소였는지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높이 쌓고 산성 본거지로 삼았다 한다. 

    당시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곳을 통과하여 조정에 상납할 조공물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등 부패한 사회계급에 항거하였다 한다.

    누각은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71년 지방 유지들의 도움으로

    10평의 2층 누각 형식의 정자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96년 수해로 유실되었고 1997년 재건축하였다.

    현재도 강 중앙에 위치한 20m 높이의 거대한 기암봉에는 임꺽정이

      은신하였다는 자연 석실이 있고 건너편에는 석성이 남아 있다.

     












    임꺽정 동상


    임꺽정(林巨正,  ?1562)

    조선 중기 의적.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

    백정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불만을 품고 정치의 문란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불만자들을 규합하여 도둑의 두목이 되었다.

    처음에는 민가를 횡행하며 도적질을 일삼다가 차츰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이 되었다.

    그 뒤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힐 뿐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명종 15) 그의 아내가 잡히자 서울로 근거지를 옮기고 겁탈을 일삼는 등 더욱 포악해졌으나

    참모 서림(徐林)이 잡히고 이어 그의 형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어 그의 세력은 약화되어 갔다.

    1561년 그의 일당이 평산(平山)에서 민가 30여 채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이자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황해도 토포사 남치근(南致勤)과 강원도 토포사 김세한(金世澣)을 평산으로 파견하였다.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대항하다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첫 수색을 벌인 지

    3년 만인 1562년 정월, 구월산에서 잡혀 사형되었다.

    그에 대한 설화와 소설이 많이 있으며, 이익(李瀷)성호사설에서

    그를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도둑으로 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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