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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손골성지(경기도 용인)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9. 1. 27. 04:30

    천주교 손골성지(경기도 용인)


    손골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유해 일부를 모신 묘와 동상,

    십자가의 길, 경당과 기념관, 피정의 집, 성 도리 신부 순교비가 있다.

    이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

    201311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성지로 옮겨 안치했고, 20153월에는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을 세웠다.

    손골성지는 2016년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이하여 성당과 사제관, 성모경당과 순교자 기념관 건립을 했다.


    손골성지 미사시간

    평일 :  월(미사없음), 화, 수, 목, 금, 토(11:00)

    주일(일) : 교중 14:00

    ※ 단체 순례자의 요청시 사전 협의 후 별도 미사 봉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 437번길 67 (동천동) 천주교 손골성지 (031)263-1242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이번에는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간 연락도 되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만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 신부의 가족들이 충청도 솔뫼를 떠나

    경기도 양지의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나,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 신부 가족들이

    충청도 청양을 떠나 경기도 안양 수리산 뒷듬이(담배촌)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 좋은 예이다.

    손골에도 이즈음에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기해박해 직후에 생긴 것 같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손골성지성당







    성요셉 像




    성모마리아 像




    성 도리 헨리꼬 神父像


    베드로 헨리 도리(Pierre-Henri Dorie)

    성 도리 신부는 1839923일 프랑스 한 농장에서 일하던 소박한 부부 사이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농장은 성 힐라리오.딸몽(St.Hilaire di Talmont)에 있는 뽀르트(Port)라는 시골의 벳세이(Bessay)백작의 농장이었다.

    헨리 도리의 부모나 형제들은 공부는 많이 못했으나 신심은 매우 깊었다.

    따라서 어린 헨리 도리는 건전하고도 평화스러운 가정환경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한편 그곳 보좌 신부는 도리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2년 어느 날 보좌 신부는 도리 부모의 승낙을 얻어 소년의 신학교 입학을 추천하였다.

    또한 벳세이 백작은 도리 가정의 생활양식이 부족하여 부모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때마다 자비롭게 이 가정을 돌보아 주었다.

    185210월 도리는 이윽고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 동안 모든 이들한테서 칭찬과 귀염을 받으며 지냈다.

    15세 때 그는 벌써 자기 생의 목표를 전교 생활에 두고 186010월에 루쏭(Lucon)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도리는 부지런하고도 침착한 학생으로 점차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생활도 열심 해 질 뿐 아니라

    특히 그에게는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다른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커져 갔다

    18661221일 삭발례를 받은 도리는 다음해 6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분들한테 자기 계획을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먼저 건강이 허약한 도리를 염려해 주고 돌봐 준 백작이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반대하며 나섰다.

    그러나 백작은 도리의 그 부드럽고도 굳은 의지에 탄복한 나머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리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매우 건강합니다.

    전교생활의 피로 같은 것쯤은 자신 있게 이겨나감을 보실 것입니다.

    신부님! 만일 제가 이 조그만 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교 신부가 된 다음 순교까지 하게될지 그 누가 압니까?

    그렇게 되면 신부님도 자랑스럽고 행복하지 않으시겠어요?"

    도리의 열렬하고도 패기에 찬 이 같은 말에 본당신부는 더 이상 반대할 수 가없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교구 주교님한테 젊은 이 전교 지망자를 데리고 가 소개하자

    주교님은 도리를 축복하여 주실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인자한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실제로 도리는 더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반대하고 나서는 가족들로 부터 오는 고통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는 대단하였다.

    그렇지만 그 아무도 도리를 프랑스에 머물도록 설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외국전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이나 이를 제 맘속에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

    아무리해도 헛수고라는 것을 안 도리의 아버지는 내심으로는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서

    18618월 성 힐라리오 역까지 나아가 아들을 환송해 주었다.

     

    고향을 떠난 도리는 자주 사랑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드리면서 자기의 즐거움과 보람됨을 말씀드리곤 하였다.

    그렇지만 부모는 아들이 돌아 와 주기를 고대하며 늘 하느님께 그의 귀국을 기도 드렸었다.

    1864531일 사제 서품을 받은 도리 신부는 장래문제에 있어 자기 뜻대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웃어른들의 결정이 내려지기 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615일 한국의 선교신부로 결정 발표되니 도리 신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욱이 친구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와 더불어 동행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반가와 하였다.

     

     <체포와 순교>

    1864719일 마르세이에서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 서 볼리외 신부. 그리고 민 마르띠노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여 수많은 어려운 항해 끝에 드디어 1865527일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교활동 기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짧았던 것이다.

    김 도리 신부는 손곡리(孫谷里:경기도 용인 손골)에서 교우들과 같이 있으면서

    많은 존경을 받는 가운데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일이 터졌다. 

     장 주교의 체포소식이 있은지 며칠 후 즉시 김 도리 신부는 1866227일 방안에 앉아 꼼짝도 못하고 잡히게 되었다.

    물론 위험의 신호가 있긴 했었지만 김 도리 신부는 우선 복사를 피신시키고

    다른 교우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잇는 물건들을 모두 감춰버리고 기다렸었다

    김 신부는 서 볼리외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 감옥에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 도리 신부도 예외 없이 많은 고문을 받았지만 강인하고도 위대한 정신력으로 온갖 고통을 잘 참아 견디었다.

    그리고 그는 장 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다음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갔다.

    이를 목격했던 한 증인은 김 도리 신부에 관해 "눈을 내려뜬 모습은 확실히 참된 기도하는 자세였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침착한 모습은 당당하기조차 하였다."고 말했다

     마침내 정해진 잔악한 의식 절차가 끝나자 처형이 실시되었다.

    김 도리 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 끝으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목은 두 번째의 칼에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순교한 김 도리 신부와 다른 전교 신부들의 머리는 그곳에 3일 동안 군문효수로 메달려 있다가

    후에 와고개(瓦署峴) 골짜기에 베드로 박순집 일행이 시신(屍身)들을 거두어 안장하였다.  




    성 오(Aumaitre) 베드로 신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 루카 3,16)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정화하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시편 11,6; 이사 30,27).

    이사야는 주님이 심판의 영과 불의 영으로”(이사 4,4) 예루살렘의 오물을 씻어내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불로 오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금이나 은을 정련하는 것처럼 (말라 3,3)

    모든 죄의 찌꺼기를 불태우는 진실한 회개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화는 마지막 때에 불의 심판에 대한 준비이기도 합니다(마태 3,12; 루카 3,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한 그분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정화되어 진정한 회개로 이끌어질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종말의 심판 때에 성숙한 이들이 되어

    하느님 앞에 다가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 어둔 밤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둔 밤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정화되는 시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 생각, 그리고 신앙은 하느님께서 보실 때 온전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온전히 정화될 때 혹은 우리가 불의 세례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참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진정으로 성숙한 이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수완(로마노) 교수 - 하상신학원 영성신학





    성 도리 기념관


    손골에는 도리 신부 기념관이 있다. 비록 임시 건물이고 또 작지만 소장품에는 귀한 것들이 많다.

    먼저 도리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이 3통 있다.

    특히 도리 신부가 186510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원본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071017일 도리 신부가 소속되었던 뤼쏭(Lucon) 교구에서 손골을 순례하면서 손골 성지에 기증하였다.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집에서 쓰던 침대보가 있다.

    이 침대보는 도리 신부의 누이이며 대모(代母)인 뽈린느 도리(Pauline Dorie)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뤼쏭 교구 순례단과 함께 손골에 왔을 때 기증한 것이다.

    후손들은 침대보 조각에 방데 지방의 표지(mark)를 손수 수놓아 기증하였다.

    또한 기념관에는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쓰던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도리 신부 생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손골 도리 신부 기념관으로 기증한 것이다.

    아울러 도리 신부 순교비의 머릿돌들이 있다.

    처음으로 만든 10층짜리 현양비 머릿돌과 18층짜리 현양비 머릿돌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무명순교자의 묘와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있다.

    도리 신부는 18662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오메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한 후인 3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3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두 성인 신부들 말고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신자들 중에도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 함께 있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손골 교우촌 신자들은 도리 신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골을 떠나지만

    다른 곳에 가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많이 순교하였다.

    그 중에서 다음의 삼대(三代)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요한,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3대가 경기 손골에서 병인(1866)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갇혔더니,

    포졸 행수(行首)가 원() 모르게 놓아 또 그곳에 살더니, 정묘(1867) 10월에 또 삼 대가 잡혔더니,

    그 포교 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하니 그 포교 말이 지금 영()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하니 베드로 말이 가자하니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더니, 경오년(1870) 223일 야경에

    서울 좌변(左邊)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聖敎)하느냐?” 한 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 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하고 그 길로 본읍(本邑)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 베드로, 프란치스코 3대가 함께 서울 좌포도청으로 들어가서 문목(問目)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이렇듯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잡혀가겠다고 하였던 할아버지 이 요한과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는 1871319() 좌포청(左捕廳)에서 다 함께 순교하였다.

     




    손골성지 사무실 입구의 고양이 형제




    손골성지기념관




    도리 신부 순교비


    도리 신부 순교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기도 했으나 2014년 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처음 순교비는 벽돌을 사방으로 10개씩 쌓아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10층짜리 순교비였다. 그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그러다가 196810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자 새로운 도리 신부 순교비를 만들었다.

    기존의 순교비에다 벽돌을 사방으로 8개씩 더 쌓아 18층짜리 순교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맨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1990년에 손골에 경당(經堂)을 지으면서 이 순교비는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경당을 준공하면서 새 순교비를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웠다.

    마찬가지로 맨 위에는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처음으로 만든 순교비 머릿돌에는 '김 베드루 신부 순교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리 신부를 '김 베드로' 신부로 소개한 것이다.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이라는 성()을 택하였다.

    요동에 있을 때는 성을 두()로 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성이 낯설기 때문에 고쳤을 것이다.

    도리 신부가 우리나라에서 김씨 성을 택하였으니 김 신부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도리 신부의 세례명을 '헨리코'가 아닌 '베드로'라 한 것이다.

    실제로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사용한 것 같다.

    도리 신부를 심문한 문초기록에서도 도리 신부가 '김 베드루'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도리 신부는 '김 베드로' 신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968106일 시복식이 있은 후 만들어진 24위 복자전 등의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삐에르 도리(Pierre Dorie)이고 모친은 즈느비에브 비뇬노(Genevieve Bignonneau)이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내어나자 헨리코(Henri)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자기와 같은 삐에르라는 이름도 하나 더 붙였다.

    그래서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적으면 삐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이다. 삐에르는 베드로를 프랑스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에게는 삐에르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으니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고 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편지를 쓰면서 언제나 도리 헨리코(Henri Dorie)라는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쓸 때는 도리 베드로-헨리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부를 때는 도리 헨리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떻든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 손골에 있는 도리 신부 순교비에도 비록 작은 글씨이기는 하지만 김 베드로 신부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성 도리 헨리꼬 김 베드로 신부 순교비'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손골성지 방문 후에 찾은 소담골(한정식)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이종무로 170번길 12 (고기동) 전화 031-272-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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