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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생가(草衣禪師 生家)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9. 6. 21. 20:30
초의선사 생가(草衣禪師 生家)
초의선사(1786~1866) 생가는 당시를 상상하여 지었다.
선사의 시(詩) 귀고향(歸故鄕)에 따르면 생가는 이미 생전에 폐허가 되었고, 가까운 형제의 후손들이 남아 있었다.
복원된 생가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초간삼간이다.
선사는 열다섯 살 때까지 이곳에 살다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나주에서 피난을 온 선사의 6대조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승달산(僧達山)에서 유달산으로 향해 뻗어 나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왕산(旺山) 자락이다.
빼어난 기운을 간직한 왕산 봉우리에는 봉화대가 있고, 그 아래에 작은 압자 터가 있다.
암자에는 운흥사에서 온 스님이 기거하였고, 선사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출가의 꿈을 가졌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 30 (왕산리)
초의선사
1786년 4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득도하고, 대흥사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일지암에서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정약용·김정희·신위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초의는 절친했던 추사 김정희를 위로하기 위해 1843년에 제주도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때 초의는 산방굴사에 머물렀다. 『원대정읍지』를 보면 “초의 스님은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였고,
추사에게 『밀다경(密多經)』 쓰기를 권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초의는 추사의 죽음을 애도하여 「완당김공제문(玩堂金公祭文)」을 지었다.
그 밖에 제주목사 이원조의 부탁을 받고 지은 시가 『초의선집(草衣選集)』에 실려 있다.
수행과 학문, 예술을 두루 섭렵했던 대선사이다.
초의는 당시의 고승 백파가 지은『선문수경』의 선에 관련한 주장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선문사변만어』를 지어 선 논쟁을 주도하였다.
범패와 원예 및 서예에도 능하였다.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 약 등에 관해서도 정리하였다.
선과 관련한 이론서인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1권, 선의 진의를 밝힌 『이선래의(二禪來儀)』 1권,
『초의시고(草衣詩藁)』 2권,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 1권, 『동다송(東茶頌)』 1권,
『다신전(茶神傳)』 1권 등의 저작을 남겼다.
艸衣(초의)
歸故鄕(귀고향) - 고향에 돌아와서
遠別鄕關四十秋 (원별향관사십추) 멀리고향을 떠난지 사십여 년 만에
歸來不覺雪盈頭 (귀래불각설영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新基草沒家安在 (신기초몰가안재)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데없고,
古墓苔荒履跡愁 (고묘태황리적수)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心死恨從何處起 (심사한종하처기)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血乾淚亦不能流 (혈건루역불능류)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孤丈更欲隨雲去 (고장경욕수운거)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已矣人生愧首邱 (이의인생괴수구)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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