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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사고 실록각(全州史庫 實錄閣)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10. 3. 19:30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서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태종 9)부터 1413(태종 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세종 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61447, 기타 전적이 64556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조선왕조실록보전기적비(朝鮮王朝實錄保全紀績碑)




    사고(史庫)의 변천사


    사고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조선시대 실록은 완성된 후 화재나 파손 위협에 대비하여 4대 사고에 분산시켜 보관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불에 탔다.

    이후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정족산(강화), 태백산(봉화), 적상산(무주), 오대산(평창)4대 사고를 지어 각각 1부씩 보관했다.

    또한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반출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世界記錄文化遺産 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472년간 조선왕조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분량이 888(1,893)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비롯해 천문, 풍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의 제반 모습이 총망라 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하여 첫번째 실록인 "태조 실록"이 완성된 후부터

    실록의 복본(複本)을 만들어 춘추관(서울)과 지방의 충주, 성주, 전주에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 전체가 화를 당하자

    실록을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의 산간지역에 4개 지방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초적 사료이며, 우리나라 인쇄문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로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피난)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흥록, 안의를 비롯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고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실록을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태조실록(太祖實錄)


    49.6cm × 27.7cm, 감견표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즉위 원년(1392)부터 7(1398)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모두 153책이며,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후에 활자로 간행되었다.




    정종대왕실록(定宗大王實錄)


    49.6cm × 27.7cm, 감견표지

    2대 국왕 정종(1357~1419) 즉위 원년(1399) 정월부터 212월까지 만 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래 이름은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


    54cm × 31cm, 감견표지

    3대 국왕 태종(太宗) 즉위 원년(1401) 정월 1일부터 18(1818) 810일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이며, 모두 361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56.4cm × 30cm, 감견표지

    정식 이름은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壯憲大王實錄)으로 모두 16315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실록은 그가 승하한 지 21개월 뒤인 문종 2(1452) 32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단종 2(1454) 3월에 완성하였다.




    문종실록(文宗實錄)


    54.8cm × 33.3cm, 감견표지

    5대 국왕 문종의 즉위년(1450) 222일부터 2(1452) 514일까지 약 24개월 동안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수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문종공순대왕실록(文宗恭順大王實錄)으로 모두 136책이었으니 1(11)은 결본이다.




    단종실록(端宗實錄)


    55.4cm × 29cm, 감색 비단표지

    원래 이름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였으나,

    숙종 때 단종(端宗)으로 추존한 후에는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 이라고 하였다.

    세조 때에 편찬된 원편(原編) 노산군일기 14권과 숙종 때에 편찬된 단종대왕실록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55.4cm × 29cm, 감색 비단표지

    정식 이름은 세조혜장대왕실록(世祖惠莊大王實錄)이며, 모두 4918책으로 간행되었다.

    끝의 2권은 세조대에 제작한 악보(樂譜)를 수록한 것으로 세종실록의 악보와 함께 아악(雅樂)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예종실록(睿宗實錄)


    55.4cm × 29cm, 감색 비단표지

    8대 국왕 예종의 재위기간(14689~146911) 13개월간의 역사를 기술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 예종양도대왕실록(睿宗襄悼大王實錄)이며, 모두 83책으로 간행되었다.




    세초연(洗草宴)을 노래한 시() - 조문명(趙文命) 학암집(鶴巖集) 2


    寸管那能盡畵天(촌관나능진화천)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於休盛德百王前(어휴성덕백왕전) 아아!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芸役(십년시흘편예역) 십년 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하일초개세초연) 한가한 날 마침내 사초 씻는 잔치를 열었네.

    晩後溪炊當美饌(만후계취당미선) 저녁에 시내에서 밥을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우후산수승명현) 비온 뒤 물소리는 거문고 가락보다 낫네.

    舊時簪筆今如夢(구시잠필금여몽) 지난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수열성서갱현연) 직접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세초하는 모습과 그 뒤에는 세초연


    실록 편찬에 사용된 기본 자료가 된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한지)는 재활용했다.

    또한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행사인 세초연을 베풀었다.

    세초의 대상이 되었던 자료들은 사관이 왕의 곁에 항상 머물면서 기록한 사초와

    실록 편찬 과정에서 작성되었던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 등이 있다.

    초초는 지금에 전해지는 게 없고, 광해군일기의 중초와 정초가 남아있어 실록이 집필되어져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실록의 자료가 되는 것들을 파기한 까닭은 후세에 정당 간의 분쟁에 악용되는 것을 피하고

    편찬자의 의도에 반하는 자료들이 후에 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록청(實錄廳)에서 실록편찬 모습


    실록청은 국왕이 사망한 후에 실록을 편찬, 간행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관청이다.

    실록청의 관원들은 사초와 시정기 등의 수많은 자료들로부터 기사를 취사 선택하고, 정리하고, 요약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사관에는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이 있다. 전임사관은 항상 왕의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했고

    겸임사관은 각 관청에서 사관을 겸임하고 있는 자들로 관련부서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업무처리 내용을 기록하였다.

    전임사관이 작성하는 사초에는 매일 작성하여 춘추관에 제출한 입시사초(入侍史草)비밀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뒤

    집에 보관하다가 실록청이 설치되면 제출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다.

    가장사초 제도는 비밀을 보장하고 그 내용의 첨삭(添削) 등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왕도 사초를 볼 수 없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편찬된 실록도 볼 수 없었다.

    실록의 편찬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최고 통치자와 위정자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였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전주사고는 1439년 외사고의 설치가 결정되었으나,

    1445년 실록 봉안이 이루어질 당시까지 전주에 사고가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려 보낸 태조실록’~‘태종실록은 전주 성내의 승의사(僧義寺)에 안치되었다.

    이후 실록은 1464년 가을에 전주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鎭南樓)로 옮겨졌다가,

    1472세종실록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서적 1,322책이 60개의 궤(실록 47, 기타 13)에 담겨 보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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