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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유적, 경기전(慶基殿) - 사적 제339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10. 9. 04:30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유적, 경기전(慶基殿) - 사적 제339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지방의 진전(眞殿)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肖像), 진전은 어진을 봉안한 궁전을 일컫는다.

    조선은 건국후 이를 기념해 1410(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태조어진을 봉안한 전주의 진전을 경기전이라고 칭한 것은 1442(세종24)이다.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소실되어,

    1614(광해군 6)전라도관찰사 이경전(李慶全)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건하었다.

    1676(숙종2)에는 진전 동편 전주사고 자리에 별전이 건립되었다.

    1919년 일제에 의해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이 철거되고 일본인 소학교가 건립되었다.

    1937년에는 별전이 철거되었다.

    1997년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 자리에 있던 중앙초등학교가 이전되고, 2004년에 부속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 형식은 다포계 건물로,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건축에서 사용된 예가 흔치않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풍남동)







    경기전 하마비(慶基殿 下馬碑)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2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새겨진 표석이다.

    , 장군 또는 벼슬이 높은 유명한 성인들의 태생지나 사당 앞에 세웠으며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곳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 새겨져 있다.

    즉,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경기전 하마비는 1614(광해국6)에 세웠으며 1856(철종7)에 중각(重刻)하였다.

    비석의 형태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 가치가 크고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상징물이다.









    경기전 정전(慶基殿 正殿) - 보물 제1578


    경기전의 정전은 정면3, 측면3칸의 일자집으로 어칸 전면에 1칸의 각()을 덧대어 지은 정자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전 좌우에는 각각2칸의 익랑과 동서에는 4칸의 월랑이 정전과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정전은 기단을 장대석 두벌대로 조성하고 상부는 바닥전을 깔아 마감했다.

    초석은 방형기저에 원형주좌를 새겼으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 머리에는 창방을 끼우고 그 위에 평방을 덧대어 주간에도 2개의 간포를 배치한 다포계 건물이다.






    태조어진(太祖御眞) - 국보 제317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여기에 태조어진을 모셔놓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있다.

    1872(고종 9)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구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

    태조어진을 봉안한 감실 안에는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색의 향주머니를 넣어 두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 두었으며, 정전 좌우편으로는 용선, 봉선, 홍개, 청개 등 의장물을 배치하였다.


       



    조경묘(肇慶廟)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


    이 사당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곳이다.

    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 도성을 쌓고 고치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1771)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경기전 제례(慶基殿 祭禮) 


    대향(大享,6대 제향)

    대제는 1년에 6(설날·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 거행되었다.

    삼헌(三獻, 술을 세 번부어 올림)및 음복례(飮福禮)까지 모든 제례 절차를 행하였다.

    1908년 두 번으로 줄여 청명과 추석에 지냈고, 광복이후에는 한 번으로 줄여 동지에 지냈다.

    1978년부터는 음력 99일 중양절(重陽節)로 바꾸어 대제를 지내고 있다.

     

    작헌례(酌獻禮)

    작헌례는 어진의 이안, 또는 환안 때 지내는 일종의 고유제(告由祭)로서, 대제와 달리 일헌(一獻)에 음복례가 없다.

     

    분향례(焚香禮)

    분향례는 매달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에 지낸다. 제수의 진설 없이 간단하게 분향 및 봉심을 겸하는 의식이다.

     




    경기전 관리(慶基殿 官吏)


    경기전 관리조직은 관리전반을 책임지는 영(, 5) 1인과 참봉(參奉, 9) 1인을 비롯하여,

    청소 관리를 담당하는 수복(守僕) 210, 소방업무를 맡은 금화(禁火) 100, 수호를 위한 충의군(忠義軍) 360명 등으로 편제되었다.

    근무 형태는 영과 참봉이 교대로 수직하였다. 수복과 금화군은 각각4명이 도수복·도금화로 선발되어 1명이 5일씩 수직하였다.

    또 수복과 금화군 중에서 각각 2명이 청지기(廳直)로 선발되어 돌아가며 수직하였다.

    이 외의 수복과 금화군은 순번에 따라 수직하였다. 시위군과 별도로 수문장을 배치하기도 했다.

    수복은 양인, 금화군은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충의군은 왕실의 후예나 공신들의 후예로 이루어졌다.

    수문장은 무관으로 도내에 거주하는 선전관과 부장 출신이다.

    봉심(奉審), 즉 어진을 살피는 일은 5일 간격으로 전관(영, 참봉)이 관복을 갖추고 행하였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全州)


    전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본향으로,

    태조의 고조부(5대 할아버지)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가 동북면 쪽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어진(초상화)을 봉안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고향이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경기전을 비롯하여

    조경묘와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등 많은 왕실 유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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