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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비문화의 중심, 정읍 무성서원 - 유네스코 세계유산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10. 13. 04:30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제166,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은 신라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태산태수(泰山太守)로 부임하며 8년동안 선정을 배풀고

    많은 치적을 남기고 이임하여 떠나자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다.

    이 후 1544(중종 39)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申潛) 선생이 6년에 걸쳐 선정을 베풀다가

    강원도 간성군수로 전임되어 떠나자 주민들이 역시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고운 선생의 태산사와 합하였다.

     

    그 후 1615(광해군 7) 고을 유림들이 서원을 세웠는데 1696(숙종 22)무성서원이라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묵재 정언충(默齋 鄭彦忠),

    성재 김약묵(誠齋 金若默), 명천 김관(鳴川 金灌)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앞에는 개울물이 흐르며 뒤에는 성황산(城隍山)을 등지고 자리한 무성서원은

    1868년 정부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아니한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도내 유일의 서원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과 둔헌 임병찬(遯軒 林炳贊) 선생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44-12 






    현가루(絃歌樓)


    외삼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1891년 건립된 전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현가루는 논어의 絃歌不輟(현가불철)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강당(講堂) - 명륜당(明倫堂)


    순조 25(1825) 강당 명륜당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순조 28(1828)에 다시 중건되었다.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강학 공간으로 사용되는 강당이 들어서 있는데,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 3칸의 마루는 앞뒤가 트여져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 전면에 걸려있는 현판을 보면 1696(丙子 11) 사액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성서원 강당 주련(武城書院 講堂 柱聯)


    揖讓進退杏亶遺敎(읍양진퇴행단유교)

    月朔參拜亨禮南丁(월삭참배향예남정)

    春秋講磨經義四子(춘추강마경의사자)

    文藝時習詩書禮樂(문예시습시서예악)

    德業日新孝悌忠和(덕업일신효제충화)

    勸規交恤藍田故約(권규교휼남전고약)








    제향영역(祭享領域)


    제향영역은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중 하나인 향사(享祀)를 지내는 곳이다.

    앞에 있는 문이 내삼문이고, 뒤에 건물이 최치원(崔致遠)6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태산사(泰山祠)이다.

    무성서원 향사는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2월 중정일에 한번 지내며 향사절차는 무성서원 원지(院紙)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산사(泰山祠)


    태산사는 신라 말 태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르는데서 유래하였다.

    고려말 훼철(毁撤)되었다가 1483(성종 14)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여러 차례 중수(重修)가 있었고, 현재 건물은 1844(헌종 10) 세운 것이다.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 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최치원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수재(講修齋)


    유생(儒生)들의 기숙(寄宿)공간으로 동재(東齋) 강수재와 서재(西齋)인 흥학재(興鶴齋)가 있었는데, 현재 강수재만 남아 있다.

    강수재는 1696년 사액 후에 고사(庫舍)를 강수재로 변경하면서 강수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현재 건물은 1887(고종 24)에 세워진 것으로 이후에 몇 번의 수리를 거친 것이다.





    고직사(庫直舍)


    무성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서원의 향사(享祀) 시 필요한 제수품을 준비하고 서원의 살림을 맡아보는 기능을 하였다.






    서호순 불망비(徐灝淳 不忘碑)


    1849년 철종(哲宗) 즉위년(卽位年)에 세운 것으로 비면(碑面)縣監 徐灝淳 不忘碑(현감 서호순 불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규모는 높이 1.23m, 폭은 0.36m, 두께 0.16m이다.




    신용희 불망비(申瑢熙 不忘碑)


    1925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에는 通政大夫 前秘書監丞 申瑢熙 不忘碑(통정대부 전비서감승 신용희 불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규모는 높이 1.16m, 폭 0.45m, 두께 0.18m이다.




    정문술 중수의조비(丁汶述 重修義助碑)최영대 영세불망비(崔永大 永世不忘碑)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1905년 일본에 의해 당시 조선말 국운이 기울자 면암 최익현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파기를 상소했으나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통분하던 중 문인 고석진, 최제학의 정론을 받아들여

    호남으로 내려와 정읍군 산내면 성황리에서 거사를 준비 중인 임병찬과 창의하기로 합의하였다.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자 대오를 정비한 후 왜군과 격전 끝에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왜적이 조선의 진위대를 선봉으로 하여 반격해오자 동족상잔은 불가하다 하여 그들에게 퇴거하라 하고 의병도 자진해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의병 100명은 차마 해산하지 못하고 최후까지 싸우다 체포되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형옥을 치르게 되어 그곳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무성서원에서 호남 지역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병오년(1896)에 있었던 최익현 등의 창의와 의병전쟁을 기념하여 1992년 정읍군수가 세운 비이다.






    무성서원중수기념비(武城書院重修紀念碑)


    이 비신(碑身)에는 무성서원 중수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사인 김인기 불망비(士人 金麟基 不忘碑)


    무성서원(武城書院) 정면의 현가루(絃歌樓) , 외삼문(外三門) 밖의 가장 우측에 위치한 고비(古碑)




    무성서원 묘정비(武城書院 廟庭碑)




    영상 이최응 불망비(領相李公最應不忘碑)


    고종 19(1882) 건립한 '領相李公最應不忘碑(영상 이공최응 불망비)'높이 121cm·40cm·두께 20cm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무성서원은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역임하였던 이최응(李最應, 1815~1882)의 도움으로

    서원철폐령을 피할 수있었는데 이 비석은 그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다.  




    무성서원 묘정비(武城書院 廟庭碑)


    무성서원의 창건 의원 방명록(芳名錄) 비석(碑石)으로 이곳에는 무성서원 중수 이후 방문했던 인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전의관 이경희불망비(前議官 李慶熙不忘碑)


    비신(碑身) 앞면에는 전의관 이경희 불망비(前議官 李慶熙 不忘碑)라 새기고,

    그 좌우로 존현기의(尊賢其義), 일편감어(一片堪語), 원모중창(院貌重刱), 비야가망(俾也可忘)이라 새겨져 있다.

    이 비의 측면에는 숭록대부전판돈녕원사 파평 윤용구 서(崇錄大夫前判敦寧院事 坡平 尹用求 書)라 새겨져 있다.

    안쪽 불망비기(不忘碑記)에는 을축중춘(乙丑仲春) 김환풍찬(金煥豊撰) 민영석서(閔泳碩書)라고 새겼다.

    을축중춘(乙丑 仲春 上)이라는 기록으로 미뤄 이 비는 1925(乙丑 年)에 세운 비석으로

    비신(碑身)의 높이는 1.0m, 폭은 0.36m, 두께는 0.12m이다.  




    현감 이정식불망비(縣監 李定植不忘碑)


    1871(高宗 8)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당시 태인 현감을 지내던 이정식 현감(李定植 縣監) 불망비이다.

    앞면에는 현감 이후정식 불망비(縣監 李侯定植 不忘碑)라 새기고

    보복수구(保復遂舊), 섬심모앙(誠深慕仰), 심분중형(芯芬重馨), 송일각명(頌溢刻銘)이라 기록하고 있다.

    임오년 3(壬午年 三 月 日)이라는 기록으로 미뤄 1882(高宗 19)에 세운 비석으로

    비신의 높이는 1.26m, 0.37m, 두께는 0.20m이다.




    전참봉 주찬형기공비(前參奉 朱燦馨 紀功碑)


    무성서원 현가루(絃歌樓) 외삼문(外三門) 밖 맨 좌측에 위치한 비석은 전 참봉 주찬형 기공비(前參奉 朱燦馨 紀功碑).

    이 기공비(紀功碑)의 의미는 비록 하급 관리를 역임했지만

    당시의 참봉 주찬형이 무성서원 중수부터 기공(紀功)까지 공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201976,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한국의 9개 서원을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1543년 건립)을 비롯하여

    함양 남계서원(咸陽 藍溪書院, 1552년 건립),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 1573년 건립),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1574년 건립),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1590년 건립),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1605년 건립), 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 1613년 건립),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1615년 건립),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 1634년 건립)이며,

    이 서원들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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