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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10. 20. 04:30

    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공민왕 21)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부석사는 20186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山地僧院)'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7곳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부석사 일주문(浮石寺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산문(山門)이니 여기서부터는 절 안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서 일심(一心)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일주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온갖 번뇌와 망상, 혼란한 생각을 버리고 깨달음의 일념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석사 일주문 앞쪽에는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현판이 걸려있고,

    안쪽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의 현판은 효남 박병규(曉楠 朴秉圭, 1925~1994) 선생의 글씨이다.

    효남은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다.






    부석사 당간지주(浮石寺 幢竿支柱) - 보물 제255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 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천왕문(浮石寺 天王門)

     

    천왕문(天王門)은 사찰 안으로 들어오는 악귀(惡鬼)를 제거하고 불법(佛法)을 옹호(擁護)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의 사왕천(四王天)을 주제하는데,

    동쪽 지국천(持國天), 남쪽 증장천(增長天), 서쪽 광목천(廣目天), 북쪽 다문천(多聞天)을 주제하는 왕이다.

    사천왕상은 소조(塑造), 석조(石造), 목조(木造) 등으로 조성하는데 각각 발아래 잡귀를 밟고 서있는 입상(立像)이다.

    사천왕이 들고 있는 기물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琵琶), 남방 증장천왕은 큰칼(大刀),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如意珠),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

     

    이 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에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높이는 동탑이 3.6m, 서탑은 3.77m이며,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두 탑의 양식이 같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맨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 범종각(浮石寺 梵鐘閣)

     

    범종각은 정면 3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부석사 안양루(浮石寺 安養樓)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安養門)’ 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어 있다.

    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수량수전(無量壽殿)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 국보 제18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本堂)으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 7(1016)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7(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1376)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 3(1611)에는 폭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무량수전 기단의 명문


    무량수전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 적화면 석수 김애선(忠原 赤花面 石手 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浮石寺 無量壽殿 石燈) - 국보 제17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팔각 석등(높이 2.97m)이다.

    맨 아래 네모난 바닥돌의 옆면에는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8개 조각하고 그 위에 각기 8개의 귀꽃 봉오리 장식을 하였다.

    그 위에 놓인 팔각기둥의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모양의 장식이 8개 새겨져 있다.

    불을 밝히는 화창 사이의 네 면에 새겨진 정교하고 세련된 보살상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석등 정상에 있던 장식은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선묘각(善妙閣)

     

    선묘각은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도왔던 선묘 낭자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의상대사는 신라 진평왕 42년에 왕족으로 태어나 불교 화엄종의 종주로서 이름을 날린 분이다.

    원래 신라의 화랑이었으나, 29세에 서라벌(경주) 황룡사에서 출가하였다.

    30세에는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그 유명한 "해골바가지 물" 일을 겪고서

    원효대사는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대사만 계속 당나라로 향하게 된다.

    온갖 고생 끝에 당나라에 도착한 의상대사는 그만 병이 나서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이라는 사람 집에서 묵게 되는데,

    이 유지인에게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렸고, 온갖 정성을 다해 그의 시중을 들면서 틈만 나면 그를 유혹하려고 했다.

    의상대사는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연정을 뿌리쳤고,

    의상의 굳은 뜻을 본 선묘는 이제 의상을 도와 불도에 정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의상은 선묘에게 불가의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로 의상은 유지인의 집을 떠나 당에서 공부를 했고, 마침내 신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대사는 작별인사를 할 겸 유지인의 집에 들렀다.

    마침 선묘는 출타 중이라 없었고, 대사는 다음 날 신라로 출항할 것이라는 말을 남겨두었다.

    집에 돌아온 선묘는 항구에서 그를 마중하려고 했지만, 당일 날 간발의 차로 그만 배가 떠난 후에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절망한 선묘는 대사에게 주려고 가지고 나왔던 옷이며 물건이 든 상자를 부처님께 빌면서 바다로 던졌다.

    그랬더니 돌풍이 일어 상자는 배 안으로 날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선묘는 이 것을 보고 부처님께 이번에는 자기가 용(물을 다스리는 신이죠)이 되어

    의상대사를 비호하게 해 달라고 빌고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선묘의 몸은 용으로 변하여 대사가 탄 배를 폭풍우로부터 보호하게 되었다.

    의상대사는 신라에 도착해서, 지금의 부석사가 있는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곳에 본시 터를 잡고 있던 5백 명의 산적들이 나타나 대사를 죽이려고 들었다.

    그 순간 모습을 감추고 대사 곁을 언제나 따라다니며 그를 보호하던 선묘가

    용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지그시 산적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산적들 머리 위로 선묘는 법력으로 거대한 바위로 변해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浮石).

    산적들은 대사에게 잘못을 빌면서 그 자리에서 모두 출가했고, 부석사를 짓는 것을 도왔다.

    의상대사는 선묘를 기리며 절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

    그 때 공중에 떠 있던 돌은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떠 있고"

    (밑으로 종이를 넣어서 통과시켜 보면 걸리는 것이 없이 매끄럽게 통과된다고 한다.)

    선묘는 석룡으로 변해 무량수전 자리 밑으로 들어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  






    浮石(부석)


    신라 문무왕 1(661)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화엄학(華嚴學)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삼장(智嚴三藏, 602~668)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대사가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鳳凰山, 818m)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 불렀다고 한다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이중환(李重煥, 1691~1756) 택리지(擇里志)에는 

    '위 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있다.'라고 적고 있다 






    부석사 삼성각(浮石寺 三聖閣)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 (), ()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장대석으로 4단 쌓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는데 지붕은 팔작 형식이다.

    그리고 기단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공포는 익공 형식이지만 마치 다포 형식처럼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1구씩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다.

    현재 내부에는 불단 중앙칸에 미륵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탱화를 모셨다.

    왼쪽칸에는 산신도를, 오른쪽칸에는 독성을 모시고 독성 탱화를 걸었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태나 부재의 깎음 수법 등으로 보아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장식성에 치우쳐 법식이 흐트러져가는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부석사 관음전(浮石寺 觀音殿)





    虛門洞天(허문동천) 三何(삼하)

     

    허문(虛門)’ 문짝이 없는  문이란 뜻이기에 아마 일주문을 지칭하는 듯하며

     ‘동천(洞天)’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세계이니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이란 뜻이 된다.

    삼하 선생이 썼다.








    마가목(馬牙木)


    마가목은 봄에 새순이 돋아날 때 새싹의 모양새가 말의 이빨처럼 올라 온다고 해서 마가목(馬牙木)이라 부르고 있다.

    마가목 열매는 오래전부터 관절염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항염작용이 뛰어나고 진통 효과를 가지고 있어 만성 관절염 증상을 완화하는데 좋다.

    특히 류머티즘 관절염 개선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마가목(馬價木), 잡화추, 일본화추, 남등(南藤), 석남등(石南藤)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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