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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치명자산성지(全州 致命者山聖地) 산상성당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9. 10. 7. 04:30
전주 치명자산성지(全州 致命者山聖地) 산상성당
천주교 성지인 치명자산성지가 있는 산이 즉 치명자산(306m)이다.
치명자산 성지 입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십자가의 길이 있고 천주교 성직자묘지를 지나면 바로 치명자산성지이다
성지에는 화강암으로 지은 산상성당이 있으며 순교자의 묘와 성직자묘지가 있으며 십자가의 길과 몽마르뜨길이 있다
산상성당 지붕인 광장에 서면 전주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가 있다.
이 산은 예로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이곳 성지에는 1784년(정조 8년)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동정부부(童貞夫婦)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아들 유문철(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마태오)등 일가족 일곱 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 여에 걸쳐 전주 남문밖(현 전동선당)과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성당 보두네(Baudounet)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선인들이 해발 300m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 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산상성당이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낙수정 2길 103-88 (대성동, 순교자묘지)
성모 마리아상
겟세마니 예수상
치명자산성지 기암, 예수 마리아 바위(Jesus Maria Rock)
치명자산 정상의 순교자 가족묘 십자가 오른쪽에는 태고 적부터 천연기암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산에 순교자 가족들을 모신 순교자들의 거룩한 신앙을 기리기 위하여 이 묘지를 찾는 신자들의 발걸음이 새벽부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듯이 이 천연기암은 하느님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묘지 쪽에서 바라본 바위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께 의탁하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예수님의 형상을 통해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충실하게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의탁하여 열렬히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 바위를 반대편 쪽에서 바라보면 십자가를 향해 서 계신 성모님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순교자들이 간직하고 살았던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신앙을 보여주는 이 형상은 예수님의 곁에 서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용감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치명자산성지(致命者山聖地)에서 본 전주시가지(全州市街地)
유항검과 그의 가족 7인의 순교자 무덤 -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
이곳은 호남의 사도(使徒) 유항검과 그 일가 7분의 순교자들이 함께 묻혀 계신 합장묘이다.
이분들은 모두 1801년(신유박해)에 순교하였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출신인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전주지방의 대부호였으며,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회에 입교한 후 호남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786년에 조직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일원으로서 신부(神父)로 임명되어
1년 정도 활약하다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는데 공헌했다.
이후 신자들이 성사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루 빨리 선교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도록 자신의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다.
그 결과 1795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유항검은 1801년 9월 17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하였으며,
당국에서는 그의 목을 전주 풍남문에 매어달아 놓고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요한, 22세)과 차남 유문철(요한, 18세)은 1801년 10월 9일 전주 옥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12월 28일 전주 숲정이에서는 유항검의 처(妻) 신 희, 제수(弟嫂) 이육희,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19세) 그리고 조카 유중성(마테오)이 순교하였다.
특히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정부부(童貞夫婦) 순교자로서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들은 각각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하여 평생 동정생활을 결심했고 이 사실을 주문모 신부에게 알려드렸다.
주문모 신부는 당시 성년이 된 남녀가 일생을 동정으로 사는 것을 죄악시했던 유교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1797년 당시 15세였던 이순이는 18세인 유중철과 결혼식을 올리고 전주 초남이에서 남매처럼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효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으며 형제들과 우애하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일곱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교우들이 유항검의 고향 초남리와 인접한 제남리에 이들을 가매장 하였고,
1914년 4월 19일 전주 정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안장했다.
전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위에 이분들을 모신 것은 이분들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이곳을 참배하는 이들이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통해서나마
순교자들께서 가신 길을 체험하게 하려는데 그 취지가 있다.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 동정녀 유섬이 묘토석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일가족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치명하였고,
당시 사형이 금지된 어린 자녀 유섬이(9살), 유일석(6살), 유일문(3살)은 각각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2014년 교회사가 하성래 선생은 ‘사헌유집(思軒遺集)’의 유섬이(柳暹伊, 1793~1863)에 관한 기록을 연구하여
큰 딸 유섬이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평생 동정녀로 순교자적 삶을 살다가 1863년 71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음을 세상에 밝혔다.
2015년 5월 경남 거제군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 산방산에서 유처자묘(柳處子墓)가 발견 되었다.
2019년 1월 22일 치명자산 성지 봉사자들과 강학회원들은 거제도 유섬이 묘소를 순례하고 묘토석을 수습하여 엄숙히 합토(合土)하였다.
천주교 순교자 동정녀 이루갈다 유혜, 그형제 유요안 송선의 묘
치명자산성지 성모마리아상
1994년 5월 9일 건립된 치명자산성지 산상기념성당
치명자산성지 미사안내
미사: 매일 11시
산상성당 : 월, 화, 목
옹기경당 : 수, 목, 토, 일
※순례자 미사 : 장막성당
(문의) 치명자산성지 사무실 전화 063-285-5755
치명자산 성지
이 산은 예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마태오) 등 일곱 분의 순교자가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이분들 가운데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 유종성 다섯 분은 2014년 8월 16일 복자의 품위에 오르셨고,
나머지 두 분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분들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신을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선인들이 해발 280m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 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복자묘 바로 밑에는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과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트(순교자산)이다.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전주 초남리의 대부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호남지역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여 호남지방 교회 창설의 초석이 되었으므로 ‘호남의 사도(使徒)’라고 부른다.
또한 가성직자단의 일원으로 성무활동 중 가성직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는데 공헌하였으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795년 첫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셔 들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형조의 심문에서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하였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의 사형언도를 받고 10월 24일 풍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동정부부 복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고 칭송하는 동정부부 순교자로서 주문모 신부의 중매로 1797년 결혼하였다.
이들은 고향 전주 초남이로 내려와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서약을 하고 4년 동안 남매처럼 살면서 효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하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동전 서약을 어길 유혹이 생길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해 나갔다.
유 요한은 1801년 11월 14일 전주옥에서, 이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한 유종철의 옷 안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아내 루갈다를 권면하고 위로하여 “누이여, 천국에서 다시 보자.”라고 하였다.
“치명하는 일이야말로 미천하고 쓸데없는 자식을 진실되고 보배로운 자식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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