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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시 승격 70주년 기념 틈새전(1970"s 수원, 수원사람들)
    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9. 12. 29. 20:01


    수원시 승격 70주년 기념 틈새전(1970"s 수원, 수원사람들)


    수원박물관에서는 수원시 승격 제70주년을 기념해 20191224일부터 202031일까지

    틈새전(작은 전시회) ‘1970’s 수원, 수원사람들을 열고 있다

    1970년대 수원 풍경과 수원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기획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당시 수원시청 공보관(문화공보실)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수원은 명실상부한 경기도 수부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수원시는 급성장했다.

    도시기반 시설이 대거 확충되고, 주택과 인구도 꾸준히 늘어났다

    1970년대 수원의 모습과 수원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추억을 선사하는 사진전으로 전시 사진은 모두 흑백사진이다.





    전시를 시작하며...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에 이전하면서 수원은 명실상부 경기도의 수부도시로 자리잡았다.

    이후 1970년대 수원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급속한 도시변화를 맞이하였다.

    도시기반 시설이 확충되고, 주택건설과 도로확장은 도시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당시 효와 전원의 도시라는 의미로 효원의 도시 수원이라 불리었고,

    수원사람들은 푸른지대와 원천유원지에서 수원의 싱싱한 공기를 만끽했다.

    1970년대 수원의 도시변화와 수원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기록된 사진을 통해 옛 추억과 수원의 발전상을 되돌아 본다.








    1969. 10. 7 / 팔달문 앞 교통 신호등


    국산 신호등이 개발되기 전 미군이 설치했던 빗금무늬 신호등이다.

    국산 신호등은 1973년부터 개발되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0. 7 / 이른아침 조기청소


    새마을 운동사업의 일환으로 대청결 운동이 벌어져 아침 일찍부터 곳곳에서 학생과 주민들의 청소가 이루어졌다.




    1970. 10. 14 / 제7회 화홍문화제 경로잔치


    수원은 오래전부터 '효원의 도시'로 불렸다.

    정조대왕의 효심을 기리며 매년 화홍문화제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풀었다.




    1970. 10. 15 / 제7회 화홍문화제 경기도청 앞 시가행진


    경기도청 앞의 멋진 밴드부(매향여상)와 시민들의 함성.

    2019년 제56회를 맞은 '수원화성문화제'는 1964년 10월 15일

    경기도청 수원이전 기공식을 맞이하여 개최한 제1회 화홍문화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원시는 경기도청 이전을 기념하여 10월 15일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1971. 7 / 광교풀장


    1962년 개장된 광교유원지와 광교풀장은 수원시민의 인기 나들이 장소였다.

    광교풀장은 1965년 재단장하여 개장하였는데, 당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참석하였다.

    1971년에는 제17회 경기도체육대회 겸 전국체육대회 수영부 예선대회가 열리는 등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1978. 7. 27 / 오토바이 불법승차


    수원에 광교풀장이 생기고, 지지대고개에 삼풍농원풍장, 원천유원지 주변에 점보풍장 등이 생기며,

    가족들이 가까운 곳으로 수영하러 가는 길이다.

    오토바이의 정원은 넘었으나 튜브를 끼고 가는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다.




    1972. 4. 24 / 서둔동사무소 앞길


    서둔동은 화성 축성 당시 축만제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하여 서쪽의 둔전(국영농장)을 경영하면서 유래된 지명이다.

    서둔동은 웃거리와 벌터로 구분되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고있다.




    1971. 8. 14 / 제1회 수원시내 국민학교 야구대회


    수원은 오래 전부터 야구와 축구의 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리나라에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되기 전부터 야구 꿈나무들은 홈런왕과 최고의 투수를 꿈꿨다.




    1972. 1. 20 / 조원동 보리밟기


    이른 봄에 겨울 동안  들뜬 겉흙을 눌러 주고, 보리의 뿌리가 잘 내리도록 싹의 그루터기를 밟아주는 일로

    주로 학생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보리밟기를 하였다.




    1972. 2. 17 / 매산국민학교 졸업식


    6년 동안의 어린이 생활이 졸업식과 함께 끝나고 중학교에 진학하여 청소년이 되었다. 졸업식은 눈물과 기쁨이 공존했다.




    1972. 3. 6 / 세류동 우물보수


    수도시설이 보급되기 전 마을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물을 찾아야 했다.

    물은 지하수가 많은 지점을 선정하여 땅을 깊게파고, 바닥에 자갈을 깔아 정수 장치를 만들었다.

    지금은 마을에서 사라진 우물 시설과 물을 부어 손으로 펌프질을 하던 수동식 수도시설이 있다.




    1972. 3. 1 / 상광교동 작은다리 공사


    광교산에서 시작된 물은 상광교동을 타고 내려오묘 수원천의 줄기가 된다.

    1970년대 들어 상광교동의 수원천을 건너기 위한 작은 다리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1972. 3 / 송죽동 초가집 전경


    송죽동은 예로부터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생긴 지명이다.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간직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1972. 9 / 수원역 앞 로터리 분수대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경부선 부설로 수원역이 만들어졌다.

    1930년대에는 협궤열차였던 수려선과 수인선도 운행되었다.

    수원역 앞이 로터리가 되면서 드넓은 광장이 들어서 대규모 행사와 민주화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1972. 3 / 연무동 길 보수작업


    1970년대에는 새마을 노임 소득사업으로 취로사업이 확대되었다.

    어린아이에서 노인들까지 길 보수작업이나 교량사업 등에 동원되어 일을 했다.

    너도 나도 모두가 마을의 일꾼이었다.




    1972. 4. 28 / 우량아 선발대회


    1920년대 시작된 우량아 선발대회는 1970년대까지 이어져 어린이 날을 전후해 열렸다.

    머리가 크고 통통하여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아기들을 우량아로 선발하면서 건강한 육아와 출산을 장려했다.

    1984년 경제성장과 함께 아기들을 상업화한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1973. 6. 21 / 영동시장 풍경


    1796년 10월 수원화성이 완공되면서 팔달문에서 지금은 없어진 남암문 쪽으로 장시가 개설되었다.

    당시 수원장은 문밖 장으로도 불리었는데, 이것이 영동시장 역사의 시작이며, 현재까지도 수원의 대표적 시장으로 발전해 왔다.




    1972. 4 / 수원갈비의 시작, 영동시장 화춘옥 골목


    수원에 과거에 우시장이 있어서 수원갈비가 대표음식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은 '수원갈비'는 이귀성이 1945년 12월 팔달문 밖 장터(현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시작한 화춘옥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화춘옥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에 왔을 때 화춘옥을 찾아 수원갈비 맛을 즐기곤 하였다.




    1972. 5. 5 / 어린이 자전거대회


    지금도 세발자전거는 어린이들의 자가용이다.

    어린이들의 건강과 기쁨을 위해 세발 자전거대회는 오랫동안 열렸다.




    1972. 5. 6. / 시민 합동결혼식


    1970년대에는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부부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해 직장이나 종교단체 등이 합동결혼식을 개최하여 결혼비용을 줄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성혼의 예식을 치를 수 있었다.




    1972. 6 / 서둔동 서울대 농대 회주도로


    서둔동은 정조대 둔전이 설치된 이래로 우리나라 농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권업모범장과 수원고등농림학교가 설립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과대학이 위치하여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힘썼다.

    사진은 당시 서울농대 회주도로로 서쪽 후문 부근에는 딸기밭으로 유명한 푸른지대가 있었다.

    현재 서울농대는 2003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로 떠났고 경기상상캠퍼스가 운영되고 있다.




    1972. 7 / 수원천 매교다리와 수려선 철교


    수려선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철도로 1930년 개통(협궤열차)되었다.

    애초 일제강점기 여주, 이천지역의 쌀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수원과 여주를 오가는 학생들과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1970년대 산업화와 도로이용이 확대되면서 1972년 3월 31일을 마지막으로 폐선되었다.




    1972. 7. / 원천유원지


    원천유원지는 일제강점기 축조된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가 해방 이후인 1969년부터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붙은 이름이다.

    수원사람들에게 과거 원천유원지는 소풍 장소이자 데이트 장소, MT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는 광교호수공원으로 재탄생되어 시민들에게 다시금 사랑 받고 있다.




    1972. 8. 19 / 평동 수해


    서호천을 끼고 있는 서둔동 벌터와 평동은 여름 장마철 비가 많이 오고나면 어김없이 피해를 입었던 곳이었다.

    지금은 배수펌프장이 생겨 물난리를 해결했다.




    1973. 10. 16 / 제10회 화홍문화제 미술실기대대회


    화홍문은 수원화성에서 수원천을 끼고 있는 북수문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불리운다.

    화홍문화제가 열리면 화홍문과 팔달산에서 미술대회, 글짓기 대회 등이 열렸다.




    1972 / 수원역 앞 로터리 공사로 남은 마지막 가옥


    수원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현재 로터리가 조성되어 있는 수원역 앞 광장은 수많은 행사와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 속 가옥은 일제강점기 구국민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던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열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도 알려진다.




    1972. 10 /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신풍국민학교 운동회


    국민학교 운동회는 온 가족이 참여하는 가족행사이자 주민화합의 한마당이었다.

    학생들이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져 열띤 경합을 벌이고, 학부모들도 경기에 참여하면서 재미를 더했고,

    학교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았는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1973. 5. / 청소차 쓰레기수거


    1970년대 정해진 시간에 쓰레시차가 소리를 내면서 도착하면 온 가족이

    고무대야나 사과상자 등에 담겨진 연탄재와 쓰레기를 한가득 가지고 나와 버렸다.




    1973. 6. 16. / 송충이 구제작업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병충해 예방을 위해 송충이 구제작업을 하는 모습이다.

    주로 방과 후 학생들이 동원되어 송충이를 잡았다.

    수원에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관리를 위해 송충이를 깨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74. 7. 22. / 팔달산 강감찬장군 동상 주변


    1972년 5월 4일 팔달산 중턱에 강감찬잔군 제막식이 있었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 집과 함께 오랫동안 팔달산의 상징이 되었다가 현재 비둘기집은 없어지고,

    2007년 강감찬장군 동상은 광교공원으로 옮겨졌다.




    1973. 6 / 화서동 숙지산


    화서동의 숙지산은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이 이루어졌던 채석장이었다.

    이곳에서 채석된 돌은 수레를 이용하여 화성 축성공사 현장까지 운반되었다.

    지금도 곳곳에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남아있다.




    1977. 9. 13. / 화서동 화서아파트


    수원 최초의 아파트는 1970년 지어진 3층짜리 서문아파트이다.

    이후 1975년 화서동의 숙지산 중턱에 화서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분양 당시 과열 투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문아파트와 화서아파트는 2000년대 들어 다시 재개발되었다.




    1975. 4. 1 / 새마을사업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서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단순한 농촌개발을 넘어 공장,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 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1974. 5. 17. / 서장대 풍경


    수원화성이 성곽의 기능을 잃고 방치되던 중 한국전쟁의 여파로 많은 부분들이 파손되었다.

    본격적인 화성 성곽복원공사는 1975년 5개년 계획에 의거해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부분적인 성곽의 복원과 수리과정이 있었다.

    사진은 해당시기에 주춧돌만 남았던 서장대(화성장대)가 복원된 모습으로 곁에는 작은 간이매점이 설치되었다.




    1974. 10. 11 / 매산로 아카데미극장


    1957년 매산로에 들어선 매산극장은 1971년 증개축을 거쳐 1974년 아카데미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개봉관이 아닌 B급 영화를 틀어주던 재개봉관으로서 좌석제 없이 한 번 입장하면 하루 종일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운영하였다.




    1975. 5. 15. / 쥐잡기 캠페인


    식량이 부족하던 1950년대 중반부터 '쥐잡기운동'이 시작됐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 1억 마리의 쥐가 있었으며, 그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32만t에 달했다고 한다.

    정부는 쥐잡기를 독려하기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표어와 포스터를 공모하고,

    각 도별로 할당량을 배정하였으며 보건소에 잡은 쥐꼬리를 가져가면 보상금을 주기도 했다.




    1975. 3. 24. / 영화동 우시장


    수원장과 함께 열렸던 수원 우시장은 하루 400마리 이상이 거래되는 전국 3대 우시장의 하나였다.

    1930년대 성안 북수동으로 우시장이 이전되었다가 다시 1962년 영화동으로 이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979. 11. 4. / 곡반정동 우시장 개장


    수원의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영화동에 있던 우시장은 도시미관과 환경위생 문제가 대두되면서 1979년 곡반정동으로 옮겨졌다.

    마방촌으로 유명했던 곡반정동의 우시장은 5일장으로 운영되다가 끝내 도시개발에 밀려

    1998년 8월 31일자로 폐쇄되어 수원 우시장의 명성도 막을 내렸다.




    1979. 3. 15. / 고등동 시외버스터미널


    수원시외버스터미널은 1975년 고등동에 터를 잡고 설치되어

    2001년까지 약 25년간 수원역과 더불어 수도권 교통의 요충지로서 기능하였다.




    1975. 5. / 수원시청 민원실 풍경


    1956년 7월 26일 준공된 수원시청사는 1986년까지 사용되다 인계동에 새청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그 후 권선구청으로 2007년까지 사용했고, 지금은 수원시가족여성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6. 5. 31. / 매월 말일은 반상회의 날


    행정단위의 최말단 조직인 반(班)을 구성하는 가구 대표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월례회로서

    1976년 5월 말부터 관 주도로 본격적으로 반상회가 운영되었다.

    반상회는 주민 상호간 친목 및 상호부조를 도모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스스로 추진하며,

    자치능력 훈련 및 민주생활 교육을 위한 장으로서 역할하였다.




    1976. 10. 25. / 결핵 무료진료 보건예방


    결핵은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염병으로 1970년대까지도 50%가 넘는

    감염률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당국은 결핵 퇴치를 위한 보건예방에 힘쓰고 있었다.




    1977. 3. 10. / 유치원 어린이 생일잔치


    1969년 제1차 유치원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으며,

    1976년부터 공립유치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당시 유치원의 모습이다.




    1977. 4. 4. / 한일합섬


    1964년 설립된 한일합성섬유공업주식회사의 수원공장은 1974년 세워졌다.

    1980년 수원공장 부설학교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가 개교했고,

    1993년 (주)한일합섬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섬유산업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1998년 IMF 경제위기로 퇴출기업이 되었고,

    폐쇄된 수원공장 부지에는 한일타운(아파트)이 지어져 1999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




    1977. 8. 16. / 영화동 절미저축


    1970년대 저축할 여유조차 없이 어려웠던 시절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기 위한 정부시책 중 하나로 절미저축운동이 시행되었다.

    절미저축운동은 가정에서 밥을 할 때마다 쌀을 조금씩 절미통에 넣어 저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1979. 1. 18. 크로바백화점 자유계량대


    소비자를 보호하고 계량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백화점과 상설시장 등에 자유계량대를 두고

    소비자들이 직접 무게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78. 12. 12. / 연탄불 파는 리어카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온돌을 활용해 연탄불을 요리와 난방에 모두 사용하였다.

    추운 겨울밤 연탄을 제때 갈아주지 않아 연탄불을 꺼뜨리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연탄불을 들고 다니며 불을 붙여주는 연탄불 장사가 있었다.




    1979. 4, 27. / 효도관광 떠나는 날


    효원의 도시 수원에서는 매년 화홍문화제 때 경로잔치를 베풀고,

    봄에는 관광명소로 떠나는 즐거운 효도관광이 이루어졌다.




    1979. 9. 25. / 소풍가는 날


    1970년대 국민학교 소풍은 학년 중심으로 반별로 친구와 손잡고

    멀게는 몇 킬로미터씩 줄지어 걸어서 유적지나 유원지, 공원 등에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말아주신 김밥 도시락과 음료수를 가방에 싸든 채 물통을 둘러 메고 소풍을 나서는 초등학생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1979. 6. 22. / 연무동 전경


    연무동은 동장대의 별칭인 연무대에서 따왔다.

    수원화성을 지켰던 장용외영 군사들이 훈련과 무술연마를 하던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면서 마을이 변화했다.




    1977. 3. 31. / 중앙극장과 3.1운동 58주년 기념 거리홍보물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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