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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5. 3. 20:02

    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5


    (시대 : 16세기 전반)

    이 비는 조선 제9대 성종의 후궁인 숙용심씨(淑容沈氏: ?~1515)의 묘 앞에 있던 묘표(墓表).

    숙용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숙용심씨는 1493(성종 24) 이전에 성종의 후궁이 되어,

    2(이성군 利城君영산군 寧山君) 2(경순옹주 慶順翁主숙혜옹주 淑惠翁主)를 낳았다.

    숙용심씨는 1515(중종 10)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표는 이수(螭首)비신(碑身)비좌(碑座)로 되어 있다.

    이수와 비신은 백대리석 하나로 만들어 화강암으로 만든 비좌에 꽂아 놓았다.

    이수에는 뿔이 없는 이무기가 보통인데 여기서는 뿔이 있는 용()을 구름무늬 속에 표현하였다.

    비좌는 2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묘표는 일본의 수상(首相)대장상(大藏相) 등을 지내다가 1936년 암살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의 기념공원(日本 東京都 港區 소재) 안에 있다가

    2001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이 묘표는 성종대왕 후궁 숙용심씨의 묘가 실재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왕실의 유물이다.

    400여 년 동안 일본에 있다가 돌아온 것으로 가치가 높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번지

     










    숙용심씨묘비환원기념비문(淑容沈氏墓碑還元記念碑文) 전문

            

    숙용심씨(淑容沈氏)의 관()은 청송(靑松)이시며 청성백(靑城伯) 정안공(定安公) 덕부(德符)의 후예(後裔)이시다.

    조선왕조(朝鮮王朝) 9(第九代) 성종대왕(成宗大王)의 후궁(後宮)으로서

    이성군(利城君), 영산군(寧山君)의 두 왕자(王子)와 경순(慶順), 숙혜(淑惠) 두 옹주(翁主)를 두셨으니

    경순옹주(慶順翁主)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에게,

    숙혜옹주(淑惠翁主)는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无疆)에게 하가(下嫁)하셨다.

    1465(世祖 11, 乙酉)에 출생(出生)하시어 1515(中宗10, 乙亥) 1116일에 졸()하시다

    향년(享年)51세이셨다이어 서울 근교(近郊)에 예장(禮葬)하였으나,

    어느덧 묘소(墓所)와 묘비(墓碑)를 실전(失傳)하기에 이르렀다

    조상(祖上) 묘소(墓所)의 보전(保傳), 수호(守護)는 후손(後孫)되는 자()의 바른 도리(道理)이거늘

    이를 소홀히 하여 실전(失傳)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큰 불효(不孝)를 어찌 감내(堪耐)할 것인가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찾았으나 모두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추측(推測)컨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에 절발지변(竊發之變)을 당한 듯하다.

    그러던 차 천만(千萬) 의외(意外)로 이국(異國)땅인 일본국(日本國) 동경도(東京都) 항구(港區) 적판(赤坂)에 있는

    아주 작은 공원(公園)에서 부산일보(釜山日報) 동경지사장(東京支事長) 최성규선생(崔性圭先生)에 의해

    묘비(墓碑)와 이에 부수(附隨)되는 듯한 석물(石物) 등이 발견(發見)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천우신조(天祐神助)의 지극한 현현(顯現)이니, 심씨(沈氏) 할머니의 깊으신 음덕(蔭德)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 긴 세월(歲月)을 낯설은 이국(異國) 땅에서 망향(望鄕)의 한()을 되씹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후손(後孫)으로서 범()한 큰 불효(不孝)에 대한 비통(悲痛), 회한(悔恨)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묘비(墓碑) 발견(發見)이라는 희소식(喜消息) 접한 이성군파(利城君派)와 영산군파(寧山君派)의 두 종친회(宗親會)

    숙용심씨묘비환원추진위원회(淑容沈氏墓碑還元推進委員會)’를 구성(構成)하였다.

    우선(于先) 묘비(墓碑) 환원(還元)을 요청(要請)코자 이에 근거(根據)가 될 옛 문헌(文獻)과 고증자료(考證資料)를 정비(整備)하는 한편,

    환원사업(還元事業)을 추진(推進)하는데 소요(所要)되는 자금(資金)을 종중(宗中)에 알려 모금(募金)키로 하였다.

    2000418, 채원(采元)과 명구(明九)는 도일(渡日), 동경(東京) 항구(港區) 구역소(區役所)를 방문(訪問),

    일체(一切)의 증빙자료(證憑資料)을 제출(提出)하고 묘비(墓碑)의 환원(還元)을 청원(請願)했다

    460여년(餘年)이 지난 지금(只今)에 와서 일본정부(日本政府)인 구역소(區役所)를 상대(相對)로 해

    반환(返還)을 요청(要請)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확실(確實)한 입증자료(立證資料)와 묘비(墓碑)가 있어야 할 정당(正當)한 장소(場所),

    그리고 후손(後孫)들의 간절(懇切)한 소망(所望)을 알리고, 주일(駐日) 한국대사관(韓國大使館)의 협조(協助) ()으로서

    항구(港區)로부터 반환(返還)의 확약(確約)을 받았다.

    616, 다시 채원(采元), 명구(明九), 한구(漢九), 채웅(采雄) 네 사람이 도일(渡日),

    일본(日本) 구역소(區役所) 구장(區長)과 관련(關聯) 공무원(公務員), () 의원(議員),

    주일(駐日) 한국문화원장(韓國文化院長), 외신기자(內外信記者)가 참석(參席)한 자리에서

    묘비반환(墓碑返還)에 따른 '목록(目錄)'을 수령(收領)하고, 오후(午後)에는 공원(公園)에 가서

    고유(告由) 의식(儀式)을 정중(鄭重)히 올리고, 묘비(墓碑)를 해체(解體), 포장(包裝)하여 수송절차(輸送節次)를 완료(完了)하였다.

    이어 묘비(墓碑)73일 그렇게도 그리시던 고국(故國)에 돌아왔다.

    큰아들이신 이성군(利城君) 묘역(墓域)에 묘비(墓碑)를 건립(建立)하려고 했으나 

    설치허가(設置許可) () 문제(問題)가 있어 부득이(不得已) 작은아들이신 영산군(寧山君) 묘역(墓域)

    ()와 정성(情誠)을 다하여 묘비(墓碑)를 건립(建立)하고 이를 계기(契機)로 제단(祭壇)도 함께 마련하였다

    할머니의 영혼(靈魂)이신들 얼마나 기쁘고 편하시며, 우리 후손(後孫)된 자() 또한 얼마나 반가우며 감격(感激)스런 일이겠는가.  

    맹서(盟誓)코 실전(失傳)의 우()를 다시는 범()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후손(後孫)들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것이며,

    앞으로 더욱 숭조(崇祖), 돈종(惇宗)코자 할 따름이다.

    복유(伏惟) 존령(尊靈)은 영세시녕(永世是寧)하시옵소서.


    2001(辛巳) 418


    숙용심씨묘비환원위원회(淑容沈氏墓碑還元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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