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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간송옛집) - 등록문화재 제521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5. 9. 04:30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간송 옛집) - 등록문화재 제521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수집하는 데 헌신한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자취가 서린 가옥이다.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890~190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 가옥 뒤에 전형필과 전명기의 묘역이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지만, 전형필 사후에 종로 4가에 있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수리가 이루어졌다.

    재건 이후 전명기와 전형필의 제사 때 재실로 사용되었다.

    2013~2015년 간송미술문화재단과 도봉구가 퇴락한 본체와 부속 건물, 주변 담장을 보수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본채 규모는 정면 4, 측면 8칸이고, 자형 구조이다.

    전형필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100여 년 된 전통 한옥으로써 건축학적 가치도 크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루봉로 149-18 (방학동)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수준 높은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수집해 

    문화유산을 수호하고 현재까지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이다.

    간송의 활동은 우리의 문화재가 도굴, 밀반출되었던 상황 속에서 해외 유출을 막고, 후대에 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교육 정책에도 항거하여 보성 학교의 인수를 위해 

    1940년에 재단 법인 동성 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7년에 고적 보존위원회 위원, 1954년에 문화재 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피촉되었고,

    1960년에 고고 미술 동인회 발기인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간송 전형필이 국보급 문화재를 수장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이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태어난 남다른 애국심과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나 

    당대 예술가,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유 활동 역시 큰 역할을 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을 미술 선생으로 만나

    그림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향후 서양화가가 된 청마(靑馬) 이마동(李馬銅) 

    시인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등을 동창생으로 만나 일찍이 예술인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후 1926년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서구식 문화뿐 아니라

    음악, 회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방면에 흥미를 크게 갖게 되어 전람회, 음악회와 같은 문화 행사에 줄곧 참여하였고,

    당시 그가 존경하였던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 김성수뿐 아니라 김용진, 박종화, 이상범, 안종원, 노수현 등 

    당대 일류의 서화가 및 문사들과 교유하며 문화, 예술 방면에 대한 안목을 자연스럽게 키워갈 수 있었다.

    실제 간송은 서예, 전각, 그림, 도자기, 수필, 각종 기고문 등 많은 글과 작품을 남겼으며

    음악, 연극에도 조예가 깊어 문화 비평가의 자질까지 갖췄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吳世昌)이었다.

    간송이 문화재 수집에 본격적인 뜻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오세창과의 인연이 깊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간송이 소장했던 회화 작품에 오세창의 글이 다수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세창은 오주석의 아들로 서화가 및 금석학자로 우리나라 서화가의 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간행하였던 인물이었다.

    오세창을 비롯하여 여러 인사들과의 친분은 미술 작품에 대한 해박한 안목과 최고의 식견을 기르게 했고,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전승하는 뜻을 세워 실천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간송이 활동하였던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는데,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극심한 도굴로 문화재뿐 아니라

    유적이 파손되거나 소멸되면서 문화적으로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던 때였다.

    일본은 아예 경성 미술 구락부라는 미술품 경매장까지 차려놓고 조직적으로 전국의 문화재를 흡수했는데

    이를 통해 일본 수집가들이 재력과 권력을 앞세워 국내에 있는 수준 높은 문화재를 쓸어 모으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매장에 출입하며 미술품을 사들일 정도의 부호(富戶)가 많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간송은 일본에 유출되는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증조 때부터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해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던 간송은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경성 미술 구락부 경매에 좋은 물건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현재 국보 제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이 경매에서 6천원에 구입한 것으로

    당시 쌀 한가마니가 15~16원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한남서림(漢南書林)[현 통문관]이라는 고서점도 운영하였는데,

    이곳으로 골동품 매입 신청이 들어오면 정확한 감정을 통해 문화재를 사들이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훈민정음 원본도 이곳을 통해 입수된 것이다.

     

    조선 총독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그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간송은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를 지켜낼 수 있었다.

    19372월 일본 신문에는 일본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족 문화를 되찾은 간송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일본에 살다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변호사 존 개즈비(John Gadsby) 당시 자신의 소장품을 팔고자 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간송의 애국적인 태도에 감동해 개즈비의 청자와 백자들이 간송에게 양도되었고,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소장품들이 고국인 한국으로 가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의견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간송은 공주에 있던 2백석지기의 농장을 팔았는데

    당시 개즈비의 소장품으로는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 뚜껑 향로(靑磁麒麟形蓋香爐),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 국보 제74호 청자 오리 모양 연적(靑磁鴨形硯滴),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 뚜껑 향로(白磁博山形蓋香爐)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일본에 유출된 국보 제135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申潤福筆風俗圖畵帖) 파격적인 고가에 다시 사왔고

    1768년에 심사정이 그린 촉석도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산 가격만큼의 거금을 들여 보수를 다시 맡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 공예, 불교 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20113월에는 12점이 국보로, 12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송의 활동에 깊게 관여하였던 오세창은 1938년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 미술관] 지석에 

    서화는 심히 아름답고 옛 골동품은 자랑할 만하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에 남은 주교로 고구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라는 글을 남겨 간송이 모았던 소장품의 가치를 알려 주었다.

    간송의 소장품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간송의 뜻과 업적, 열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며,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대변해 주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간송 미술관의 소장품은 연중 봄·가을 두 차례 특별전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19621월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작고한 간송은 도봉구 방학동에 소재한 아버지 묘역에 함께 묻혔다.

    묘소 주변에는 살아생전 간송이 거처했던 근대기 전통 한옥(등록 문화재 제521)이 있어 

    그의 묘소와 함께 간송의 자취를 살필 수 있다.





    우리 문화 지킴이 전형필

    문화재 수집가이자 교육자인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일제 강점기에 외국으로 유출될 뻔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지키신 훌륭한 이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갑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필 선생은 젊은 나이에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유산을 뜻있는 곳에 쓸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 사람들에 의해 약탈되거나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혼을 지킨 전형필

    전형필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물려받은 재산을 일제에 의해 해외로 유출되는 귀중한 문화재를 직접 사들이는 데 썼습니다.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수천 점의 문화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중 상당수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도봉구 방학동에는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킨 전형필의 묘소와 가옥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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