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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한옥마을(恩平韓屋村)일상생활속에서/우리의 옛 것들.. 2020. 5. 10. 04:30
은평한옥마을(恩平韓屋村)
SH공사(서울주택도시공사)가 은평뉴타운에 개발하여 분양한 또 하나의 은평한옥마을.
분양은 완료됐지만 곳곳에 아직도 짓지 않은 터가 일부 남아있다.
상업시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옥이 원주민들이 거주하거나 개인 사유지로 되어있어서 한옥 내부 관람은 불가하다.
다만 일부 가옥의 경우 가옥 사유주의 판단에 따라 체험이 가능하며 사유주의 허락을 받으면 입장이 가능하다.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지역이므로 일몰 이후 밤 시간대에는 소음행위를 자제해야한다.
2016년에 올리브TV 옥수동 부부수제자 촬영지로 유명하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은평한옥마을회관 - 한옥기술개발단 신한옥형 공공건축물
은평한옥마을에 위치한 한옥마을회관은 국토교통부와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이 지원하는
도시건축연구사업(한옥기술개발 - 신한옥형 공공건축물 최적화 모델개발 및 구축)의 일환으로
한옥기술개발연구단(명지대학교, 한국토지주택공사, 대진대학교)과
유치기관인 서울특별시(공동기관 - SH공사)와의 협업을 통해
한옥기술개발의 연구성과물을 검증하기 위해 구축한 것입니다.
전통양식과 현대기술이 융합된 한옥마을회관은 현대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경제성, 시공성, 거주성을 접목하였다.
이는 향후 한옥의 전통미 구현 및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또한 한옥을 접하기 어려웠던 일반인들의 삶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한옥의 이해와 더불어 인식의 변화, 보급 및 확산에 기여할 것이다.
셋이서 문학관
우리 문학사에 기인으로 평가되는 시인 3인(천상병, 중광, 이외수)의 전시실과 북카페가 있다.
- 입장료 : 무료
- 운영 일시 : (화)~(일) 09:00~18:00
- 정기 휴관일 : 매주 (월), 1/1, 설·추석 연휴.
삼각산 금암미술관
은평한옥마을 터 이야기
천 년의 드라마가 살아 숨 쉬는 명당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전, 고려시대 제8대 왕 현종 때
거란족의 침입이 하루를 거르지 않고 빈번하였는데, 마침내 현종이 결단을 내립니다.
“지금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구나. 온 백성과 함께 불심의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는 불교가 국교였기에 불심의 힘으로 나라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는 대대적인 역사를 하게 됩니다.
두 가지를 단행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그 우명한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찰을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건 정성을 다해 목판에 글씨를 새겨 나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사찰을 건립할 최적의 장소를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사찰은 지세가 좋고 기의 흐름이 좋은 곳 이라야 한다,
이 나라에서 눈이 밝고 귀가 맑아 땅의 기운과 지세를 능히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최고의 길지를 찾아 그 터에 사찰을 건립하라."
왕의 명을 받아 전국의 내노라하는 풍수의 대가들이 한반도 곳곳을 샅샅이 살펴본 후
결국 낙점한 지역이 바로 진관사가 자리 잡은 곳, 은평한옥마을이 자리한 곳입니다.
예로부터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세를 알고 기의 흐름을 아는 선각자들이 전국에서 길하기가 으뜸인 곳을 찾고 또 찾아 불심의 기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가 건립한 곳으로 알려진 삼천사 역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유명한데,
당시 조정에서 원효대사에게 삼각산의 어느 곳에 사찰을 건립할 것인지 물었다.
"삼각산의 주봉은 비봉이니 비봉을 중심으로 위쪽에 한 곳, 아래쪽에 한 곳이 가장 좋은 혈이 모여 있다.
두 곳에 건립하는 사찰은 천년만년 번성하여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번창을 도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사찰이 아래쪽은 승가사이고 위쪽이 바로 삼천사입니다.
은평한옥마을이 자리 잡은 곳에 있습니다.
진관사에는 또 다른 드라마가 숨어 있습니다. 고려 현종은 임금이 되기 전 살해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때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 준 단 한명의 승려가 있었으니 바로 진관대사입니다.
임금은 자신을 지켜준데 대한 보답으로 진관사를 창건하였고,
이는 국가사찰로서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월은 흘러 고려가 망하고 1592년, 조선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왕조 고려에 대한 향수가 있는 백성들이 많았지요.
건국을 주도한 태조 이성계로서는 조선의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억압하는 억불정책을 내세웠지만 이에 대한 대책을 내야 했습니다.
“동요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이 나라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승려들이 있는 곳,
가장 길한 지역에 있는 사찰에서 대대적인 기원제를 하겠소.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보시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선비들이 알아낸 사찰이 진관사였고, 태조 이성계가 직접 진관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조 6년(1397) 진관사에 59칸의 수륙사를 건립하고 수륙제를 성대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수륙제란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불쌍하고 외로운 영원을 위로하고자 공양을 드리는 불교의식입니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에서 대대적인 불교행사를 하였으니 진관사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위대한 왕 세종이 다녀간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이 한글 창제의 꿈을 펼치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대국 중국이 있는데 왜 우리의 글자가 필요하냐며 의문을 품고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우리의 대왕 세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글자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으니, 당분간 이곳에서 연구합시다.”
대왕 세종은 오늘날 우리가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는 한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옥마을이 자리 잡은 이곳을 수시로 지나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옥마을 안에는 숙용심씨의 묘표가 있습니다.
숙용심씨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대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은 후궁으로 애잔한 사랑의 주인공입니다.
용무늬와 구름무늬가 조각된 독특한 문양이 있는 이 묘표는 무려 400년 동안
일본의 한 공원에 있다가 지난 2001년 반환을 해 온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모여 비밀결사대를 조직한 곳도 이 지역입니다.
최근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물품이 나왔는데요.
그 물품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상완 스님이 진관사에 있던 초월 스님에게 전달한 태극기와 독립신문, 신대한신문입니다.
이렇게 은평한옥마을이 자리잡은 곳은 신라, 고려시대에서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그야말로 천년의 드라마가 끊이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역사적인 지역이자
지금도 풍수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풍수의 본보기가 되는 으뜸가는 명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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