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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천년에 으뜸 충신, 박제상(朴提上, 363~419)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8. 6. 21:58

    박제상(朴堤上, 363~419)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한다.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하였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그의 세계(世系)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그 결과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 :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에 끌려갔다.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목숨을 바쳐 왕자를 구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예였다.

    눌지왕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 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구출 해냈다.

    다시 왜로 건너가 미사흔을 몰래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왜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왜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그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신라, 고구려와 왜에 볼모를 보내다

     

    신라 실성왕은 즉위 직후(402) 왜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데,

    왜왕은 그 징표로서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청하였다.

    또한 실성왕 11년에는 고구려가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실성왕은 그를 보냈다.

     

     

     

    눌지왕, 박제상에게 두 아이를 구해올 것을 청하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두 아우를 구해올 사람을 찾던 중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들은 제상의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가 주기를 청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구하다.

     

    “신이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로이 돌려보내 주신다면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게 생각함이 한량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점을 유념해 주소서" 라고 고구려왕을 설득하자,

    고구려왕은 복호와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럭하였다.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않고 왜로 향하다.

     

    눌지왕이 기뻐하며 위로하여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 단지 한 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은 비록 열등한 재목이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달리 왜는 입과 혀로 달랠 수 없으니

    마땅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신이 왜에 가거든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곧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 온 자와 같이 하였으니 왜왕이 의심하였다.

    그러나 신라왕이 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을 정말 배반한 자로 여기고 감시를 소홀히 하자,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떻게 혼자서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미사흔 홀로 귀국하였다.

     

     

     

     

    신라 눌지왕,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다.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왕은 박제상을 목도(木島)로 유배보냈다가 돋 사람을 시켜,

    섬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에 목을 베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애통해하며 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히 물품을 내리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하여 그의 충절에 보답하였다.

     

     

     

     

    죽어서 새가 되어 만나리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 딸 아기, 둘째 딸 문랑, 셋째 딸 아경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보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첫째 딸과 셋째 딸과 함께 정절사를 하였는데,

    후에는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돌아왔다고 한다.

     

     

     

    신라 천년에 으뜸 충신, 박제상(363~419)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으로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를 기지를 발휘해 구하고 순국한 충신이다.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숙종은 '신라 천년의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하였고,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또한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슬픔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산신모가 되니,

    백성들은 부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치술령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되세기고 있다.

    '치술령곡'은 신라 대 노래로 애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에 그 유래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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