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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건 신부 상(金大建 神父 像)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0. 30. 20:1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聖)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금가항(金家巷) 교우촌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4차례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끝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에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만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다.


    나이 : 25세 / 순교 연월일 : 1846년 9월 16일 / 순교 장소 : 새남터 / 형벌 : 군문효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송산리) 천주교 솔뫼성지

     

     

     

     

    金大建 神父 像(김대건 신부 상)

     

    수선탁덕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의) 마을에서 천주교 신자 김계준의 맏아들로 태어나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특히 그의 총명하고도 용감했던 신앙생활과 이역만리 마카오를 비롯한

    동남아 일대에서 10여 년간의 유학생활은 최초로 서양문물을 접하고

    국위를 선앙하여 조국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겨레의 정신적 좌표를 설정한 선구자적 역할을 다했다.

    이에 그의 얼을 본받고 길이 빛내기 위하여 우리 보호자이신

    성모님의 모상으로 탑을 세우고 존엄하고도 성스럽게 동상을 제작하였다.

     

    1977년 12월 23일

    황민성 주교 글씨, 구자오 신부 글, 전뢰진 교수 제작

     

    수선탁덕(首先鐸德)이란?

    수선(首先)은 ‘가장 먼저’라는 뜻이고, 탁덕(鐸德)은 ‘사탁(司鐸)’이라고도 하는데

    ‘천주교회의 사제’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즉, ‘첫 번째 성직자(聖職者)’라는 뜻이다.

     

     

     

    ✝ 성인 김대건신부 시성 기념비

     

     

     

    福者鐸德 안드레아 金大建之殉敎百週年記念碑

     

     

     

    시성식(諡聖式) :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내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聖下)로부터 시성(諡聖)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

     

    김대건 신부의 본관은 김해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 성인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피신하여 골배마실에 정착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7세로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이곳에서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 된다.

    그해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활동을 하시던 중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의 입국로를 준비하던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조선의 조정 대신들에게 서양 학문을 일깨워 주는 활동을 하며

    처형되기 한 달 전에는 마지막으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을 작성하였다

    그해 9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군문효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된다.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먹뱅이(묵리)에 살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월 26일에 미리내에 안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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