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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11. 1. 04:19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문성사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 인성교육관 등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 원권과5천 원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 산수도, 묵포도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단정한 필치의 초서, 전서 등의 글씨

    사친(思親), 유대 관령 망친 정(踰大關嶺望親庭)등의 한시가 전한다.

    이이(李珥)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관찰사,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天道策),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학교 모범(學校模範)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24 (죽헌동)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

     

     

    문성사(文成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연산군 때 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지낸

    수재(睡齋) 최응현(崔應賢, 1428~1507)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외손 이이(李珥, 1537~1584)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건축물의 하나로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건물로 4칸짜리 대청과 2칸짜리 방과 마루로 구성돼 있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고미반자를 두었으며 삼면은 창호문으로 둘렀다.
    주심포와 유사한 이익공계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심포 집에서 익공식 집으로 넘어가는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조선 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전경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조선 초기의 서화가로 호는 사임당(師任堂), 시임당(媤姙堂), 임사재(姙師齋)이다

    강릉 북평촌(北坪村), 지금의 오죽헌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이이가 ‘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어머니는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또한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중략)

    평소에 묵적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기록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사임당은 산수, 영모(翎毛), 초충, 포도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산수도, 초충도, 묵포도도, 묵매도, 노연도(鷺蓮圖),

    노안도(蘆雁圖), 자리도(紫鯉圖) 등의 그림과 초서, 전서와 같은 글씨,

    그리고 친정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등의 한시가 있다.

    사임당의 재능은 그 자녀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이이(李珥)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고

    맏딸 매창은 조선 중기의 묵매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묵매도를 남겼으며

    막내아들 이우(李瑀)는 활달한 필치를 보여주는 초서와 그림을 남겼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 在臨瀛(자친학발 재임영)
    서울길 홀로 떠나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 獨去情(신향장안 독거정)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 時一望(회수북촌 시일망)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白雲飛下 慕山靑(백운비하 모산청)

     

     

    신비로운 대나무 꽃(오죽화)

     

     

    오죽(烏竹) -학명: Phyllostachys nigra

     

    중국 원산의 왕대속의 일종이나 전래 경로와 연대는 미상이다.

    줄기의 색이 검기 때문에 오죽이라 불린다. 검정대, 흑죽, 분죽이라고도 한다.

    높이 2∼10m에 달하고 나무껍질이 검은색이며, 잎은 장피침형으로 가지 끝에 5개씩 난다.

    꽃은 6∼7월에 피고 과실은 영과(潁果:벼의 열매와 같이 열매의 껍질이 건조하고 씨에 붙어있는 열매)로

    가을에 결실한다.

    줄기의 색은 처음에는 녹색이나, 가을 무렵부터 멜라닌 색소가 증가하여 검정으로 변한다.

    색의 농담이나 변하는 방식은 입지에 따라 다르다.

    이 식물은 품위가 우아하여 관상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이이(李珥)가 태어난 강릉의‘오죽헌(烏竹軒)’도 오죽(烏竹)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오죽이 많이 심어져 있는데 독특한 아름다운 인상을 준다.

    이 나무는 토양의 비옥도, 수분을 많이 요구하나 내한성이 다소 있으므로

    우리나라 중부 일부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

    오죽은 방풍림뿐 아니라 정원이나 공원에도 알맞은 수종이다.

     

     

    강릉 오죽헌 표석(江陵 烏竹軒 標石) -보물 제165호

     

     

    율곡선생행장기(栗谷先生行狀記)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 이곳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이원수(李元秀) 공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 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 살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 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自慶文)을 지어 입신행도(立身行道)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물두 살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 살 진사 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스물한 살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스물세 살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스물아홉에 문과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좌랑(吏曹佐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우부승지(右副承旨)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사조(四曹-戶曹, 刑曹, 兵曹, 吏曹)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33세(1568)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교육자 철학자이자 경세가인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정치 경제 사회개혁을 동호문답(東湖問答)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도(社倉制度)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때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학교 모법(學校模範)을 저술하였다.

    1584년 49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율곡 이이 동상(栗谷 李珥 銅像)

     

    본관은 덕수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이고,

    어머니는 우리 구원의 여성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사임당(師任堂) 신(申)씨이다.

    율곡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에 어머니가 용꿈을 꾼 후에

    이곳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태어나

    1584년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여 어린 나이인 8세에 지은 화석정(化石亭) 시와

    10세에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는 길이 세상 사람의 찬탄을 받은 글이고,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29세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장원 급제하여 양관(兩館) 대제학과

    여러 조(曹)에 판서를 두루 거쳤고 사후 영의정에 종직 되었다.

    율곡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문(文), 사(史), 철(哲)의 수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 유학의 거벽(巨璧)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독창적 견해로 이기설(理氣說)을 진일보시켰고,

    나라와 민생을 걱정한 현실의식에 투철하여 개혁의지를 구현하려고 힘썼으며,

    그 유명한 10만 양병론도 이러한 의지의 표상이다.

     

     

    자경문(自警門)

    율곡 선생이 20세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뜻을 기리고자

    오죽헌 입구의 외삼문인 자경문(自警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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