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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9칸 저택, 청송 송소고택(靑松 松韶古宅) -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6. 26. 04:18

    리빙카페 백일홍(百日紅) - 송소고택 앞

     

     

    松韶世莊(송소세장)

     

     

    솟을대문 현관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 옆 건물은 행랑채(문간채)라 하여 하인들이 거주했다.

     

     

     

    헛담

     

    이 저택의 특징은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살짝 가린 헛담이 있다는 점이다.

    헛담은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드나드는 아녀자를 위한 배려였는데

    바깥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에서 여인들의 드나듦을 잘 볼 수 없게 가려주었다 한다.

     

     

     

    경상도 북부 민가양식으로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바깥 마당에 담장으로 구획한 내·외담과 대가족 제도하에서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 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작은 사랑채

     

    이곳에는 주로 맏아들(長男, 장남)이 기거한다

     

     

     

    다소 외진 곳에 자립잡은 별채

     

    조선시대 별채는 주로 딸들의 거처로 쓰였는데,

    이곳 안내문에는 귀한 손님이 묵는 곳이라고 씌어 있다.

     

     

     

    제비집을 짓지 못하도록 창호지를 붙여놓았다.

     

     

    靑松沈氏 本鄕(청송심씨 본향)

     

     

    還去靑松(환거청송)

     

    落葉滿程時(낙엽만정시) 나뭇잎 떨어져 가득한 길거리에서

    吾家兄弟離(오가형제이) 우리 집 형제 이별하는가

    送君還故土(송군환고토) 그대를 미리 고향에 돌려보내며

    白首看雲思(백수간운사)  흰머리 형은 저 구름을 쳐다보며 아우 생각에 잠기노라,

     

    이 시는 6세조 石村公 諱孝尙(휘효상)께서 아우 晩遇公 諱孝淵(휘효연)을

    고향으로 보내시면서 남긴 시(詩)다.

    晩遇公(만우공)께서는 嘉善大夫 戶曹參判(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지내셨으며,

    고향인 덕천(德川)에 돌아와 사시다가 1490년 홍치 경술년(弘治 庚戌年)에 졸(卒)하셨고,

    묘소는 덕천 구지곡(求之谷) 축좌(丑坐)이다.

    이곳 덕천은 始祖 文林郞公(諱 洪孚, 휘 홍부)의 묘소가 가까이 모셔져 있고

    석천공 만우공 형제분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충효의 훈(訓)을 가훈(家訓)으로 삼아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 청송심씨(世居地 靑松沈氏)의 본향 덕천이다.

     

     

     

    靑松沈氏 本鄕 德川마을(청송심씨 본향 덕천마을)

     

    山川(산천)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인심 또한 후덕하니

    이곳이 바로 우리 청송심씨의 貫鄕(관향)이다.

    우리의 시조 文林郎公 諱 洪孚(문림랑공 휘 홍부)께서는

    이곳을 관향으로 득성(得姓)을 하시고 뿌리를 내리시어 두 아드님을 두셨으니

    長(장)은 閤門祗候公(합문지후공) 諱(휘)가 淵(연)이요,

    次(차)는 奉翊大夫公(봉익대부공) 휘가 晟(성)이시다.

    휘 淵이 또 아들 한 분을 두시니 이분이 靑華府院君(청화부원군)이요 휘가 龍(룡)이시다.

    휘 龍께서 또 두 아드님을 두시니 長에 휘가 德符(덕부)요 次의 휘가 元符(원부)이시다.

    큰아들 휘 德符께서는 고려 말에 門下侍中(문하시중)을 두 번 하시고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와 靑城伯(청성백)에 봉하시고 左議政(좌의정)에 올랐다.

    다음으로 岳隱公(악은공) 휘 元符께서는 麗末(여말)에 典理判書(전리판서)로 계셨는데

    李成桂(이성계)의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고려가 망하자

    “忠臣(충신)은 不事二君(불사이군)”이라, 濟(제)나라 충신 왕촉의 道(도)를 따라

    杜門洞(두문동)에 드시니 이날이 公의 亡日(망일)이라 하셨다.

    두 분 형제께서는 文武兼全(문무겸전)으로 경륜이 높아

    나라를 경영하시는데 항상 앞에 나와 계셨다.

    靑城伯(청성백)께서 7형제를 두시니 다섯째 安孝公(안효공) 휘 溫(온)이

    世宗 國舅(세종 국구)로 영의정이요, 여섯째가 靑原君(청원군) 휘 淙(종)이시니 부마이시다.

    安孝公의 女로 世宗 王妃(세종 왕비)를 삼으시니 昭憲王后(소헌왕후)이고

    아들 恭肅公(공숙공) 휘 澮(회)가 정승이 되시니 마침내 三代 정승의 家門(가문)에 올랐다.

    九世祖 휘 連源(연원)과 휘 通源(통원)은 형제정승으로 甲族(갑족)의 班列(반열)에 들게 하고,

    3 王后(왕후), 13 相臣(상신)에 4 駙馬(부미)를 이루니 報本(보본)의 禮(예)를 다 하였도다.

    岳隱公(악은공)께서 세 아들을 두시니 첫째가 令同正公(영동정공) 휘가 天潤(천윤)이요,

    둘째가 縣令公(현령공) 휘가 天柱(천주)이시고 셋째가 휘 天湜(천식)이시다.

    아버님의 가르침으로 風光(풍광)좋은 이곳 德川(덕천)에 터를 잡고

    世世年年(세세년년) 後生(후생)을 敎導(교도)하니 어언 世居地(세거지)가 되었도다.

    그러나 岳隱公의 유택이 없고 공의 信標(신표)하나 없어 후손으로 민망하더니

    이제야 宗人(종인)들의 뜻을 모아 재실을 창건하고 享壇(향단)을 設壇(설단)하여

    歲一祀(세일사)를 올리게 되니 이것이 모든 후손들의 敬意(경의)의 뜻이로다.

    壬辰(임진 1592)년 4월 17일 왜병 15만 대군이 동해를 덮고

    각 방면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오니 국운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11世祖 벽절公 휘 淸(청)께서는 지금이 바로 죽기로 맹세하고 나가 싸울 때라 생각하나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지라 公은 눈물을 흘리시며 어머님께 말하기를

    “忠孝(충효)는 함께 하기 어려우나 이 한 몸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하니

    어머님이 쾌히 허락하셨다.

    큰아들 應洛(응락)을 대동하고 倡義(창의)하니 응모자가 80여명에 이르고

    여러 장수들과 합세하여 싸우니 왜적들이 못견디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丙申年(병신년)에 公이 詩를 지어 말하기를 “같은 하늘아래 원수가 같이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죽어도 걱정이 없다.” 하였다.

    丁酉年(정유년) 12월 21일 島山(도산)전투에서 적진에 들어가 혈투를 하였으나

    마침내 왜구의 총을 맞고 순절하니 슬프다!

    의병으로 전투에 임한지 5년 7개월 만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나 다시 이 지방의 곳곳에서 왜구가 창궐하여

    나라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이르렀다.

    벽절公의 8代孫 老師(노사) 敦寧府都正(돈령부도정) 휘 誠之公(성지공)께서 분격하여

    15명의 親知(친지)와 함께 수백의 의병을 이끌고 倡義(창의)하여 왜구에 항전하였다.

    싸움은 격해지고 총에 맞고 칼에 찢겨 온몸이 부서지고 피가 터지는 고통을 견디시며

    왜군을 섬멸코자 분전하였으나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애를 다하여 순절하시니

    11世祖 휘 벽절公과 함께 그 이름 靑史(청사)에 남겼도다.

    2世祖 奉翊大夫公(공익대부공)은 휘 晟(성)은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長은 判書公(판서공)으로 휘가 련이요 次는 上護軍公(상호군공)으로 휘가 卿(경)이다.

    판서공의 후손은 鐵原地域(철원지역)에 뿌리를 내렸으나

    상호군공 후손은 世居地가 北方이라 소통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靑松沈氏는 청송 고을에서 得姓한지 750여 년에 年年이 계승하여 明賢達士(명현달사) 배출하고

    英祖(영조) 때 이르러 德川 호박골에서 沈處大公(심처대공)은 萬石의 富를 이루었고

    代를 이어 세습하니 7대손 松韶 琥澤公이다.

    1880년에 저택을 신축하고 이사하여 현재에 이르니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으며,

    마을이 관광지가 된 것은 다 이런 연유 해서이다.

    光復(광복) 후에도 이곳 덕천에서 岳隱公 후손 宜渙(의환) 宇永(우영) 두 분 長官과

    吉燮(길섭) 明輔(명보) 두 분 國會議員을 배출하여 子子孫孫 번영하니

    그 後光이 靑松고을에 찬연하리라.

     

    청송심씨 대종회 문화이사 沈載㤠(심재영) 지음

    청송심씨 악은공 19대손 沈相翰(심상한) 건립

     

     

     

    천연염색(Nature Dyeing)

     

    천연염색은 숙성을 통해 천의 속까지 염색이 되므로 탈색이 되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무엇보다 청송만이 가진 약수물을 가지고 염색을 하여

    약수물 속에 포함된 탄산, 철분성분 등이 색깔을 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한 염색에 필요한 재료를 청송의 수려한 자연환경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여성들의 스카프와 손수건, 침구류, 의류 등에 이용되고 있다.

     

     

     

    99칸 저택, 청송 송소고택(靑松 松韶古宅) -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만석(萬石)의 부(富)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세손

    송소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선의 본거지인 덕천마을에 이거하면서 지은

    99칸의 저택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대문은 솟을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사랑채에는 주인이 거처하였고,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고택이며, 청송 심부자(沈富者)가 살았던 집이다.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길 15-2 (덕천리)

    송소고택 www.송소고택.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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