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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문화의 보물창고, 칠현산 칠장사(七賢山 七長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1. 7. 15. 04:08

    칠장사 천왕문(七長寺 天王門)

     

    서남향의 칠장사 천왕문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 대웅전에서

    ㄱ자로 구부러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왕문 안에는 4구의 사천왕상이

    좌우에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다.

    천왕문의 입구를 중심으로 하여 오른편의 앞쪽 천왕상은 칼을 들었고,

    대웅전 쪽 천왕상은 비파를 들고 있다.

    왼편의 앞쪽의 천왕상은 오른손에 용을 잡았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如意珠)를 잡고 있으며,

    대웅전 쪽 천왕상은 오른손에 당(幢)을 잡고 왼손은 허리에 대고 있다.

     

     

     

    칠장사 소조사천왕상(七長寺 塑造四天王像) - 경기도 유형문화재

     

    칠장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며 영조 2년(1726)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은 세상의 중심에 가장 높이 솟아 있다는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과 4대주(四大洲)를 수호하는 신장(神將)으로,

    손에는 각각 비파(동방지국천왕), 보검(남방증장천왕),

    용과 여의주(서방광목천왕), 창(북방다문천왕)을 들고 있다.

     

     

     

    범종루(梵鐘樓)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의 어두움이 햇빛처럼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삼악도는 고통 벗고 도산지옥 부서지고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소서.

     

     

     

    극락전(極樂殿)

     

     

    칠장사 종무소

     

     

    죽림리 삼층석탑(竹林里 三層石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 부재를 죽림리 강성원 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 선생의 기증으로 2005년 11월 2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설치하였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75cm이고 상대갑석은 하나의 판석에

    옥신 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한 면에는 둥근 문고리를 조각하였으며

    탑신마다 모서리 기둥(隅柱, 우주)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상륜부에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 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장사 대웅전(七長寺 大雄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인(人)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공포 형식은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각 칸마다 2개의 간포(間包)가 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중앙에는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모셨다.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 - 보물

     

    이 불상은 원래 죽산면 봉업사 터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에 옮겼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긴 것으로 입상과 광배가 동일 석으로 조성된 것이다.

    봉업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며

    공민왕이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눈, 코, 입은 마모가 심하여

    전체적인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원만하다.

    양쪽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와 어울려 위엄을 자아낸다.

    통견 법의의 옷 주름은 여러 겹의 원호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 옷이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까지 들어 손바닥을 가슴에 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 자연스럽게 법의 자락을 잡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 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비교적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넓이, 등의 신체 비례가 좋은 편이다.

    광배(光背)는 두신광(頭身光)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주위에는 꽃무늬를 두르고 있고

    이중 테두리의 주광과 신광에는 아무런 바탕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단지 두광에 여러 가지 모양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화불(化佛) 3구(軀)가 배치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되어 있지 않은 평평한 판석이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 형의 유려한 옷 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시대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화강암 재질로 불상의 높이(광배와 입상까지) 198cm, 입상 높이 157cm이다.

     

     

     

    칠장사 거북바위

     

     

    응향각(凝香閣) - 선방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응향각은 현재 시민선방으로 개방하여

    스님과 일반신도들이 같이 참선하며 정진하고 있다.

     

     

     

    칠장사 원통전(七長寺 圓通殿)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보살을 흔히 원통 대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관음보살이 계신 전각을 원통전이라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2중 기단의 기둥은 민흘림 방식이며.

    창호는 전면 어칸에 4 분합문, 양협 칸에는 2 분합문을 달았는데

    양측면과 후면에는 창호가 없다.

    조선 영조 원년(1725년) 선진ㆍ두한 두 스님이 건물을 짓고,

    이듬해 윤영ㆍ처휘 스님이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칠장사 명부전(七長寺 冥府殿)

     

    명부전은 고통받는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신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자연석 외벌대 기단, 자연석 초석 위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규모는 40.07㎡이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들이고 정면을 제외한 3면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시왕을 모시고 있다.

    측면 3칸 중 양쪽은 협칸이고 내부 배면부에 대보 밑까지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이 명부전은 영조 2년(1726)에 건립하였으며, 그 뒤 철종 7년(1857)에 기와 중수가 있었다.

     

     

     

    궁예(弓裔)와 임꺽정(林巨正) 벽화(壁畫)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 대사(갖바치 스님)를 만나

    이봉학 등과 의형제를 맺은 곳이다.

    갖바치는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쳐

    가죽신이 안성 특산물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들을 피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일곱 도적 및 소나무 이야기는

    혜소국사와 관련된 일곱 도적 및 나옹 대사의 소나무 이야기가 그 모태다.

    조선의 의적 임꺽정의 전설은 백정 출신으로 민초들에게 가죽신 짓는 법을 가르쳐

    유기와 더불어 가죽신을 안성의 명물로 만든 갖바치인

    스승 병해 대사를 만나러 임꺽정은 자주 칠장사에 오는데,

    갖바치는 10년 동안 임꺽정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자신의 애마 칠장마를 주는데

    이 상황이 명부전 벽에 그려 있다.

    천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던 그들,

    꺽정이 스승 갖바치를 위해 만든 꺽정불이 벽초 홍명희가 임꺽정을 썼던

    1930년대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임꺽정과 함께 명부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은 궁예다.

    신라 왕실의 서자였던 궁예는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한쪽 눈을 잃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진 채

    이후 이곳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활 연습을 했다 한다.

    지금 명부전 뒤편에 있는 궁지(弓地)는 바로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하던 곳으로,

    활(弓)을 잘 쏘아 궁예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국사전(國師殿)

     

     

     

    공덕전(功德殿)

     

     

     

    부도(浮屠)

     

    영각(影閣)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지은 공덕전(功德殿) 주변은 연못이 있다고 했는데

    연못은 메꿔졌는지 공터이고 그 옆에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부도 3기가 있다.

    명문이 마모되어 주인공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육각형 지대석 위에 다시 육각형 돌을 얹은 듯한 형태인데, 전부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다.

    그 위에 또 6 각형 기둥과 상대석을 얹었다. 그 옆에 있는 부도는 좀 더 세밀한 표현을 써서

    하대석에 안상(眼象. 靈氣窓)과 연꽃이 새겨져 있고

    기둥돌괴임도 표현되었으며 그 위에 6각의 기둥을 세웠다.

     

     

     

     

    감로수(甘露水)

     

    甘露淸茶(감로청다) 청정하고 시원한 감로 청정수

    普益衆生(보익중생) 널리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네.

     

     

     

    大功德主 李基洪 朴玉山 浮屠之碑(대공덕주 이기홍 박옥산 부도지비)

     

     

     

    오십삼불명호비(五十三佛名號碑)

     

    1694년 칠장사를 차지하기 위한 세도가의 방화 후에 불타 버린 사찰을 재건하고 탄명 스님이

    1793년 칠장사의 암자인 명적암 아래에 오십삼불상(五十三佛像)과 오십삼불명호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오십삼불호명비만 남아 있어 칠장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옥개(屋蓋)를 갖춘 비석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비좌(碑座)를 만들었다.

    전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五十三佛名號(오십삼불명호)"라고 쓴 후 아래에 본문을 쓰고 있다.

    대웅전의 계단 앞에 있다가 현재는 공덕전(功德殿) 옆에 있다.

     

     

     

     

    청신녀(淸信女) 전주 유인(全州孺人) 이갓난공덕비, 기일(忌日) 2월 24일

     

     

     

    어사 박문수(御史 朴文秀) 합격 다리

     

    때는 바야흐로 1723년, 과거 수험생 박문수는 두 번의 낙방 끝에

    오늘날 '문과 수시의 SKY'라고 할 수 있는 진사과에 당당히 수석 합격하게 되었다.

    25세부터 도전한 시험을 8년 만인 32세에 삼수 끝에 장원급제한 셈이다.

    박문수의 합격 일화인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試)'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 이곳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나한전의 부처님이 나타나 과거시험에 나올 시제(試題)를 알려주어

    박문수는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암행어사와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오늘날 칠장사 나한전은 각종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합격 기도의 명소가 되고 있다.

    박문수 다리를 건너 칠현산으로 올라가면 어사 박문수길이 펼쳐져 있다.

    천년고찰 칠장사와 칠장사를 품은 칠현산의 정기를 받으며

    어사 박문수의 전설을 따라 함께 걸어볼까요?

     

     

     

     

    어사 박문수길 종합안내도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 慧炤國師碑) - 보물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83세가 되던 고려 문종 8년(1054)에 입적하였다.

    고려 문종 14년(1060)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이 비는

    김현(金顯)이 글을 짓고 민상제(閔賞濟)가 글씨를 썼는데,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흑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碑身)의 높이는 241cm, 폭은 128cm이며,

    양쪽 옆면에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현재 비는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 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박문수가 장원급제한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조선 중기에 천안에 사는 박문수라는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갈 때 이야기다.

    길을 나서는 날 아침, 어머니는 박문수에게 조청으로 만든

    유과 보따리를 손에 쥐어주며 당부하였다.

    “가는 길에 꼭 칠장사 나한전에 유과를 공양하고 기도를 드려라.”

    어머니 말씀대로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를 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어머니의 말씀도 있으셨고 해서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나한님께 불공을 드린 후 잠을 청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밤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서 과거시험의 시제를 알려주며

    총 8줄의 답안 중 7줄을 가르쳐주고,

    나머지 한 줄은 박문수 네가 알아서 써내라 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일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내내 나한님이 가르쳐주신 글과

    마지막 시구를 생각하며 걸어 걸어 한양 과거시험장에 도착하여 시험을 보는데

    과연 나한님이 가르쳐준 시제라 깜짝 놀라고 만다.

     

    시제(詩題)는 낙조(落照)였다.

    나한님이 알려준 대로 7줄을 쓰며 나머지 한 줄을 써내려 가는데 일필휘지라!

     

    낙조토홍괘애산(落照吐紅掛碍山) : 넘어가는 해는 붉은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 찬 하늘 갈까마귀는 자로 재는 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문진행객편응급(問津行客鞭應急) :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심사귀승장불한(尋寺歸僧杖不閑) : 절을 찾아 돌아오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원중우대영(放牧園中牛帶影) :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망부대상첩저환(望夫臺上妾低鬟) : 남편을 기다려 높은 누대 위에 섰는 아내의 쪽 그림자가 낮다

    창연고목계남로(蒼然古木溪南里) :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마을에는,

     

    여기까지는 나한님이 꿈속에서 알려준 후 나머지 여덟 번째 글은 박문수가 지는 것이다.

     

    ※ 단발초동농적환(短髮草童弄笛還) :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이 답안으로 박문수는 장원급제를 한다.

     

    ※ 시험관(試驗官)들은 이 시(詩)는 사람이 지은 시(詩)가 아닌 듯한데,

    마지막 구절(句節)만 사람이 지은 것 같다며, 앞 구절(句節)들은 모두가 비애(悲哀)가

    깃들어 있는 시(詩)라면 마지막 종장(終章)에 환(還)이 희망적(希望的)이며

    생동감(生動感)을 주는 것은 물론(勿論)이거니와 이 시(詩)는 필유곡절(必有曲折)로

    생각(生覺)되어 박문수(朴文秀) 시(詩)를 장원급제(壯元及第) 시(詩)로 뽑게 되었다.

    박문수가 써 내려간 시를 ‘꿈속에 나타나 과거에 오르는 시’라는 의미에서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한다.

     

    박문수가 나한님께 유과 공양을 올리고 기도한 덕에 나한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셨겠지만

    그의 인품으로 보았을 때 효성과 사람 됨됨이가 나한님도 감동받을 정도의 성품이라

    나한님께서 큰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곳 나한전은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치르러 가면서 칠장사에 머물던 중

    꿈에 나온 시제가 과거시험에 그대로 나와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각으로서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곳 나한전을 찾아 기도를 한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불기 2559년(2015) 7월 11일 낙성되었다.

    그동안 나한전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협소한 건물이었지만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丁) 자형 건물이다.

    부처님과 7 아라한(阿羅漢)을 모셨다.

    아라한(阿羅漢)이란 arhat의 주격인 arahan의 음사(音寫)로

    흔히 나한(羅漢)이라 약칭하여 쓰기도 한다.

    이를 한역하여 응공(應供)ㆍ살적(殺賊)ㆍ불생(不生)ㆍ

    무생(無生)ㆍ응진(應眞)ㆍ진인(眞人)이라 번역한다.

    이는 소승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하기도 하지만

    크게는 대ㆍ소승(大ㆍ小乘)을 막론하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한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그리고 산신(山神)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나옹송(懶翁松)

     

    수령 약 600년 정도의 소나무는 고려말 신승(神僧) 나옹선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비스듬하게 나한전을 향해 자라고 있다.

     

     

     

    제중루(濟衆樓)

     

     

     

    칠현산 칠장사(七賢山 七長寺)

     

    칠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632~647) 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顯宗) 5년(1014)에는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칠장사와 칠현산(七賢山)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우왕(禑王) 9년(1383)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歷朝實錄)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위한 원찰로 삼아 크게 중수하였다.

    현종(顯宗) 15년(1674), 숙종(肅宗) 30년(1704), 영조(英祖) 원년(1725),

    고종(高宗) 15년(1878) 등 수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1970년대에 이후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하여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제296호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혜소국사비, 철제당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오랜 역사와 함께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弓裔)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의적 임꺽정(林巨正)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399-18 (칠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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