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열 동산 -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일상생활속에서/사람사는 현장 2021. 9. 15. 21:18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李韓烈, 1966.8.29.~1987.7.5.)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에서 지냈고, 광주에서 동산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
광주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6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평범했으며 만화사랑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했다.
당시 한국은 정치적 혼란의 시기였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심문을 받다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발표하여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던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다발적으로 벌어졌고,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 참여,
연세대 정문 앞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 가운데에서 교문 진출을 막으려는 전경들과 대치했다.
이날 일부 전경이 원래 고각으로 발사하도록 되어 있는 최루탄을 학생들을 향해 수평으로 발사했다.
이한열은 이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아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7월 5일 뇌손상이 회복되지 않은 채 합병증인 폐렴이 발생,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한열의 장례식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전국적으로 160만의 추모 인파가 그의 죽음을 기렸다. 광주광역시의 망월동 5.18 묘역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군사 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이어졌으며, 1987년 10월 27일 대통령 직선제를 반영한
제9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2004년 연세대학교 근처에 이한열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한열 기념사업회가 운영되고 있다.
친구 한열이를 기억하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들이 세우다.
작가 : 최병수
강기남, 강성문, 강인선, 강찬주, 고민식, 곽민수, 구본욱, 권민정, 권성호, 권양훈, 권준안, 권혁철,
김기성, 김남수, 김달수, 김달재, 김동호, 김병일, 김성래, 김세준, 김영부, 김영수, 김영호, 김영훈,
김용철, 김익만, 김인교, 김인식, 김재율, 김재형, 김진호, 김창재, 김천곤, 김청동, 김태관, 김학연,
김현, 김현구, 김형표, 남인봉, 노영주, 도헌수, 류창우, 맹영재, 문병선, 문희재, 박대준, 박성문,
박양수, 박일수, 박준하, 박진모, 박창수, 박천택, 백운성, 서화진, 송주호, 신원정, 신호철, 심미성,
안경민, 안성호, 안승환, 안철희, 양봉호, 오성일, 위진오, 윤승용, 이강훈, 이순철, 이영주, 이재혁,
이종명, 장영준, 전철희, 정기붕, 정충욱, 최우성, 한민석, 한병훈, 홍수진, 홍창희 2020. 6. 9.
1987 69 75 79 22
1987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500여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제 타도와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수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국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 등 여덟 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69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6.10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 대회'가 열렸다.
다음날 있을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출정을 준비하는 집회였다.
교문 밖에서 시위를 하던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교 2학년 이한열은
사람을 향해 낮게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학우들은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75
7월 5일 이른 새벽,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그는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세상을 떠났다.
부검 결과 최루탄 피격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79
7월 9일 시민들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희생을 애도하며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전국적으로 160여 만 명이 참여한 추모 속에 연세대학교 본관을 출발한 이한열은
신촌로터리와 서울시청 앞을 거쳐 고향인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22
그때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이한열 기념비
이 기념비는 1987년 6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1988년 9월 14일에 세워져
한열 동산을 27년간 묵묵히 지켜온 옛 추모비가 세월의 무게에 손상되었다.
이에 여러분의 뜻을 모아 2015년 6월 9일 다시 세웠다.
1987 69 75 79 22는 한 젊은이의 짧은 삶에서 안타깝던 31일간의 기록이며,
또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가장 극적인 시간과 중첩되어 있다.
그는 87년 6월 민주항쟁과 오늘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 기념비는 개인에 대한 추모를 넘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던
그때의 열망과 헌신, 그리고 희생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이자 성찰이다.
김대중 前 대통령 기증
배은심(이한열 모친) 기증
이한열 동산
이곳은 한국사에 민주주의의 한 획을 그은 1987년 6월 민중 항쟁의 불씨가 된
이한열 열사의 추모비가 위치한 이한열 동산이다.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군에서 출생했다.
광주 동산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했다.
1987년 6월 9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한다.
시위 도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SY44 최루탄을 수평으로 발사, 이에 피격당해 쓰러진다.
세브란스로 옮겨졌지만 1987년 7월 5일, 27일 동안의 투병 끝에 민주의 꽃으로 산화한다.
지금까지도 이한열 열사가 외치던 민주주의는 실질적 의미에서 충분히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민중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6.10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개인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이 되고, 공동체의 발전이 다시 개인의 발전이 되는,
모든 민중이 모든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실천으로서 그러한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
다시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의미가 될 것이다.
故 이한열 열사 21주기 추모제 기획단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內
'일상생활속에서 > 사람사는 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석(秋夕) - 한가위 (0) 2021.09.20 곰탕이 건강을 말아 먹는다.(황성수 의학박사) (0) 2021.09.19 국민지원금 지급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0) 2021.09.14 무선조종자동차(無線操縱自動車) (0) 2021.09.11 층간소음(層間 騷音) (0) 202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