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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史蹟) 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2. 19:05

    당포성 동벽(堂浦城 東壁)

     

    당포성 동벽은 성내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면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성의 규모는 높이 6m, 폭 31m, 길이 50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이지만 석성을 쌓기 전에

    먼저 점토를 다져 쌓은 후 그 외면에 석성을 쌓아 올린 토심 석축의 구조이다.

    중심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3단의 보축 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앞에는 폭 6m, 깊이 3m의 구덩이(潢, 황)를 파서 적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동벽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된 수직의 기둥홈(柱洞)이 관찰되는데,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평양의 대성산성 등

    고구려의 산성들에서 확인된 바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당포성 동벽에서는 수직의 기둥홈이 하부의 확과 세트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는 성벽의 훼손 및 붕괴 위험이 있어 흙을 덮고 잔디를 식재하여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임진강(臨津江)

     

    한강의 제1지류이며 길이 272㎞, 유역면적 8,135㎢이다.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 두류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판교군 남부에서 고미탄천을 합한 뒤 이천군을 지나 철원군 내에서 평안천·역곡천을 합친다.

    휴전선을 지나 연천군 전곡읍과 군남면 경계에서 한탄강이 흘러들며,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파주시로 흐르다가

    문산천·사천을 합친 뒤 파주시 탄현면에서 한강에 흘러든다.
    하천의 이름은 파주시에 있는 고구려의 진임성을

    신라 경덕왕 때 '임진'으로 고침에 따라 이 명칭을 따서 '임진강'이라 했다.

    자료 출처 : 다음백과

     

     

     

    벙커(bunker)

     

    방공호(防空壕)나 요새(要塞)를 이르는 말로 주로 공중 폭격에 대비하여

    피난 시설로 구축한 방공호를 뜻하지만, 전선에서 방어용 무기를 거치하고

    적의 공격을 방호할 수 있도록 두꺼운 방호벽과 천장으로 덮인 진지(陣地)를 의미하기도 한다.

     

     

     

    목화(Cotton) - 면화(棉花)

     

    목화(면화)는 고려시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이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목화에서 나오는 솜은 실, 무명천, 이불솜, 옷솜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고,

    특히 추위로부터 사람을 구한 아주 유용한 식물이다.

    요즈음은 목화의 열매로 기름을 짜서 바이오 에너지에 쓰이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원나라에서 목화를 발견하다.

     

    문익점은 고려 때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31세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첫 벼슬로 김해의 사록을 지낸 후 사간원 좌정이 되었다.

    홍건적의 침입에 대한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문익점은 이공수와 함께

    사신으로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그곳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목화를 보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누에고치로 만드는 비단옷과

    삼이라는 식물에서 얻은 삼베옷을 입었다.

    비단은 무척 비싸고 귀한 옷감이었으며 삼베나 모시는

    추운 겨울을 나는 데는 너무 얇아 적당한 옷감이 아니었다.

    목화가 있다면 사계절 두루 잘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문익점은 무명을 만드는 그 목화를 들여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원나라는 무명을 수출하여 돈을 벌고 있었으므로

    그 씨를 다른 나라로 가져가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때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공민왕이 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므로

    그 속에 잡혀 있는 공민왕의 숙부 덕흥군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실행하였다.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문익점도 그 사건에 관계되었는데 덕흥군의 군사는 고려 군사에게 패배하였고

    문익점도 역신으로 몰려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때 문익점은 장차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게 될

    무명옷을 만들 수 있는 목화씨 열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그것을 어디에 숨겨 가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씨를 붓대롱 속에 몰래 넣어 가지고 온 것이다.

     

     

    한 톨의 씨가 전국으로 퍼지다.

     

    고향에 돌아온 문익점이 그 씨앗을 장인 정천익과 나누어 심었으나

    재배하는 방법을 몰랐던 문익점은 한 톨의 씨도 싹 틔우지 못하였다.

    다행히 장인이 심은 씨 중에서 딱 한 알이 싹터 그 싹이 자라 백여 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씨앗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3년 만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비단이나 삼베를 짜던 방법으로는 목화에서 씨를 빼는 기술도 없었으며 방법도 몰랐다.

    그때 마침 정천익은 중국에서 온 중을 만나 그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씨 뽑는 기계인 씨아와 실 뽑는 기계인 물레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알려지면서 10년 만에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문익점의 이러한 노력이 알려지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다시 그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이성계를 따르는 관리의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69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업적은 목화 재배가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이렇게 무명 옷감과 솜은 우리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대전차 방호벽(對戰車防護壁)

     

    대전차 방호벽(Anti-tank barricade)은 유사시에 벽의 밑부분에

    폭약으로 건축물을 부숴 떨어트려 전차의 진행을 막는 장애물을 일컫는다.

    전방 또는 중요 군사 요충지 도로마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는 대전차 장애물이다.

    고가 낙석(高架 落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

     

    고구려 시대 임진강변에 돌로 쌓은 평지성이다.

    당포성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높은 수직 절벽이 끊어진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임진강의 물길이 만들어낸 수 km에 달하는 수직 절벽은 현무암 주상절리도 되어 있는데,

    높이 20여 m에 달해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평지로 연결된 부분만을 돌로 쌓았는데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연천 일대 고구려성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포성 남쪽 성벽인 주상절리 절벽은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양과 함께

    하천의 침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사적(史蹟) 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성이다.

    강에 접해 있는 두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나머지 한 면(동쪽)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하였다.
    한강 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먹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 보루 등

    19여 개의 고구려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당포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강물의 흐름이 느려져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으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포성은 고구려 시기에 처음 축조되었지만

    신라가 점령한 후에는 성벽을 고쳐 쌓아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의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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