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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史蹟) -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1. 11. 26. 20:07

    신라 경순왕릉

     
     

     

    재실

     

     

     

    신도비 비각

     

     

     

    신도비(神道碑)

     

    이 신도비는 발견되기 전까지 고랑포 주민들이 빨래판이나 징검다리로 이용되는 등 방치되고 있었다.

    1976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발견한 후 1986년에 재실과 신도비 비각을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신도비는 마모가 심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10자 정도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신도비 비각에 쓴 메모지

     

    추정 신도비

    신도비란 돌아가신 분의 업적이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묘로(墓路) 입구나 왕릉 앞에 세워둠

     

    ※ 비면에서 찾아보기

    사람 얼굴 형상, 한자(漢字) 10자 정도 – 마음이 고우면 잘 보인다고 함.

    풍수로 본 왕릉은 팔백연화격(八百蓮花格),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이다.

    이곳은 상서(祥瑞) 로운 기운이 많은 곳으로 수험생을 둔 부모나

    고민이 있는 분들이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해결하는 풍습이 전해오는 곳이다.

    방문하신 김에 잔디광장을 순회하면서 바라는 바를 염원하시고 좋은 기운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적 제244호 신라 경순왕릉

     

     

     

    신라 경순왕 능표(新羅 敬順王 陵表)

     

    앞면(前面)

    新羅 敬順王之陵(신라 경순왕의 능)

     

    뒷면(後面)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

    宋太乎興國戊寅麗景 宗三年四月四日薨謚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 南八里癸坐之原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

     

    왕(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셨다.

    송 태평흥국 무인(戊寅, 978년),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丁卯, 1747년) 월 일에 다시 세우다.

     

     

     

    지뢰(MINE)

     

     

     

    경고문(Warning)

    민간인 출입 통제지역(Civilian Restricted Area)

     

    이 지역은 미확인 지뢰 / 불발탄이 산재되어 위험하니

    지정된 장소 외 출입, 채집 및 영농 등 불법행위를 절대 금지합니다.

     

    - 제7296부대장, 파주시장, 연천군수 -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휘는 부(傅)이며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경순왕이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력이 쇠퇴하였다.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였는데,

    특히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大勢)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고려 왕건(王建)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경순왕이 경종(景宗) 3년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英祖)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陵表), 양석(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등이 이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運柩)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하는 이유로 운구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릉이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되었다.

     

     

     

    사적(史蹟) -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경순왕이 즉위할 당시 한반도는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는 후삼국 시대였다.

    신라는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으며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와중에 귀족의 권력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경순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를 되살리기는 힘들었다.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다.

    그 후에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다.

    경순왕이 고려 경종 3년(978)에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능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잊혀 오다 조선 영조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었다.

    전하는 바로는 운구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라는 이유로 막았다고 한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권을 확립해가던 고려가

    경주에서 치러질 장례로 자칫 민심이 동요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왕릉으로서 곡장(曲墻)을 두르는 격식은 갖추었지만,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아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되었다.

     

    * 식읍 : 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지급한 일정한 지역

    * 사심관 :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의 일에 관여하던 관직

    * 곡장 :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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