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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維石 趙炳玉 博士 生家)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1. 20:12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維石 趙炳玉 博士 生家)

     

    이곳은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초가였던 생가가 이후 와가로 변형된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대지 550평에 안채 15평, 부속사 7평, 일자형 초가로 원형 복원하였다.

    조병옥 박사는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한국전쟁 때 내무부장관, 이어 제3.4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960년 2월 15일 불의의 신병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으며

    그 공적을 길이 선양하고 후세에 본받을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249 (용두리)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은 조선왕조의 격랑기였던 고종 31년(1894년) 3월 21일에

    이곳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 조인원(趙仁元)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공(公)은 191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미(渡美)하여

    펜실베니아주 킹스턴시의 와이오밍고등학교에 입학,

    19118년에 졸업을 하고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 흥사단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에는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YMCA 이사 및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2년 조선일보사의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냈고,

    1937년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 1890~1945) 장덕수(張德秀, 1895~1947)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미 군정청의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힘썼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 유엔 한국 대표로서 외교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6.25 동란 때는 내무부 장관으로 대구 방위 전선에서 전투지휘를 하면서

    철수하라는 유엔군의 요청을 거부하여 6.25 동란의 전환점을 이룩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 1956년에는 민주당 조직에 참가하여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에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야당을 영도하였으며,

    1958년에 다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자유민주주의 실천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신명을 바쳤다.

    1960년 민주당 대표로 출마하였으나 신병으로 도미,

    윌터리드 육군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묘소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다.

    유석은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정성으로 몸 바쳐 불세지공(不世之功)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요,

    정치가로서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의회민주주의를 펼치려다

    병세 악화로 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우리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單章)을 추서 한 바,

    천안군에서는 공(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본받을

    역사의 장으로 삼고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운다.

    1995. 4. 20 천안군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조병옥

    소화 12년(1937년) 8월 2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소화 4년(1929년) 12월 21일 형사과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뉴욕 한인들의 야유회(1921년), 독립기념관 소장

     

     

     

    조병옥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경제학과 재학 중(1921년)

    독립기념관 소장

     

     

     

    필라델피아 한인 대표자대회에 참가한 대표들(1919년 4월 16일),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소장

     
     
     

    191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간 조병옥은 한인들의 결속을 다지면서

    독립운동 인물을 양성하는 단체 흥사단에서 충청도 대표로 활동했다.

    1921년 서울에서 이광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인격 수양과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수양동맹회를 창립했고,

    1923년 1월 16일 평양에서 대성학교 동창생들이 모여

    동우구락부를 조직하여 국내에 두 개의 흥사단 단체가 결성되었다.

    1925년 12월 두 단체가 수양동우회로 통합되고 다시 이름을 동우회로 변경하여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6월부터 8월까지 동우회 회원 181명이 일경에 의해 검거되어

    조병옥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6월 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반일 사회운동단체인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고,

    1929년 7월 21일 서울지회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일제의 민족 차별과 탄압으로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본부는 전국적인 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신간회 본부가 일경(日警)에 포위되어 회원 44명이 체포되고 조병옥은 3년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경제학과 재학 중에

    뉴욕 한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결성했다.

    1921년 4월 30일 미국 11개 지역 학생 대표들이 뉴욕에 모여 북미 대한인 유학생회는

    학생들의 친목 도모와 진로를 위한 정보교류,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되었다.

     

     

     

    1914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유학을 시작한 조병옥은

    1918년 펜실베니아주 킹스턴시의 와이오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경제학과 재학 중이었다.

     
     
     

    1919년 4월 1일 조병옥의 고향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아버지 조인원과 동생 조병호가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형과 2년 6월 형을 받았다.

    이러한 3.1 운동에서 표출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 총대표회의가 열렸다.

    서재필, 이승만을 비롯하여 정한경, 조병옥, 유일한 등 광복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인사들이 다수 참가하여 여러 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필라델피아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호위 아래

    대회가 열린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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