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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성 죽주산성과 송문주 장군 사당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5. 21:18

    忠義祠(충의사)

     
     
     

    송문주가 몽골군과 대치하던 당시 성을 포위한 몽골군이 죽주산성 안에는 물이 별로 없으니

    곧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안 송문주가 커다란 붕어를 잡아서 몽골군 진영에 보내

    "멀리서 오셨는데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 물고기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성에 물이 많음을 알렸고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크게 이겼다는

    전승과 함께 채제공이 살던 당시까지도 죽산 사람들은 송문주를 가리켜

    "송 장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상들께서는 어륙(魚肉)이 되었을 것이고,

    조상 없이 우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죽산 사람들이 이렇게 밭 갈고 우물 파서

    부모 처자 데리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 장군의 은혜다"라며 송문주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기념물, 안성 죽주산성(安城 竹州山城)

     

    죽주산성은 1236년(고종 23) 죽주 방호별감 송문주가 몽골군과 15일간 전투를 펼쳐서 승리한 곳이다.

    이는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지속적으로 산성을 보수하여 활용하였다.

    국난극복의 성지로 알려져 산성에 대한 정비가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2001년부터 발굴조사도 연차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으로 구조로 밝혀졌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 축조시기도 규명되었다.

    전체 둘레는 약 1,688m이고 원래 높이는 6∼8m(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양대로 111-71 (매산리)

     

     

     

    신출귀몰한 장군, 신명(神明) 송문주(宋文胄)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이후 4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유린하였습니다.

    전란으로 인한 경기 지역의 피해는 매우 극심했는데, 안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몽고의 침입은 참혹했지만 고려의 항쟁도 치열하였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였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안성의 죽주산성 전투는 고려 고종 23년(1236) 3차 침입 때의 일입니다.

    죽주는 개경에서 충주를 거쳐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에 있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최씨 무신정권도 죽주의 중요성 때문에 몽고의 1차 침입 때 박서(朴犀) 장군이 이끌었던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송문주 장군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몽고군이 죽주 근처에 이르자 백성들을 죽주산성에 들어가게 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절요]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고 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쫓아 보냈더니,

    다시 와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 하니 몽고 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또 인유(人油), 소나무 홰, 쑥불 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에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몽고의

    공격 방법을 예측하여 방어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휘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그에 응해야 한다."라고 미리 공격 계획과 방어방법을 알려주었고,

    적이 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하였습니다.

     

     

     

    송문주 장군 사당(宋文胄 將軍 祠堂)

     

    이 사당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화성 축성 책임자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쓴 번암집(樊巖集, 1791년) 송장군묘비명(宋將軍廟碑銘)으로 추측 건데,

    송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송장군묘비명에는 사당을 만든 지 500~600년이 지나서 대들보가 부러지고

    계단이 무너져 있는 것을 1767년 죽산 부사 유언지(兪彦摯)가 옛적과 같이 고첬다는 기록이 있다.

    1933년 8월 25일 동아일보에는 ‘후대 사람들이 송장군 충렬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수백 마지기의 위토(位土 : 제사와 관련된 일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장만한 토지)까지 장만하였으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제향날이면

    죽산의 군인들이 취타대를 앞세우고 성대히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도 죽산면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원래는 1칸짜리 건물이었으나 1978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현재의 건물로 중수하였고,

    구조는 맞배지붕 익공집 형식이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신도(神道 : 신이 다니는 길)로

    본래 일반인들이 통행하는 길은 아니지만 현재 통행로로 사용되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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