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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베드로)의 묘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2. 1. 3. 19:14

    박순집 베드로는 이모의 도움으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박순집 베드로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앵베르 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시흥(현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순집의 부친 박 바오로는 1868년 3월 23일 자기 아들(박순집의 큰형) 집에서 잡혔고,

    아들 내외와 동생과 함께 포청옥에서 치명하였다.

    잡혀 간지 6일 만에 비신자 일가들이 시신을 찾아 매장했다고 한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신부,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병인박해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체포되어 1866년 10월 17일 형 요한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그 일가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안장하였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 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 중앙 성당이 세워져 있다.

     

     
     

    박순집의 인천교구에서 전교 활동과 거룩한 선종(善終)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 줄로 알고 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러운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 살은 20여 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같은 해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성지 내에 천묘(遷墓)하였다.

     

     
     

    증거자 박순집 묘

    신앙의 증거자 密陽朴公順集之墓(베드로)

    1830. 10. 9. ~ 1911. 6. 19.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베드로)의 묘

     

    박순집(朴順集)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부친 박 바오로는 아들인 박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張) 외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들의 시신들을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날 순교 역사의 증거자가 된다. 그로 인해 밝혀진 순교자의 행적은 150명이 넘어,

    그 순교자들의 유해를 우리가 직접 보고 조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셨다.

    그 후 인천교구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갑곳리) 천주교 갑곶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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