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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
    국내 나들이/길거리에서 2022. 1. 26. 21:05

    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 先生)

     

    김구(金九) 선생은 1876년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서

    부친 김순영(金順永)과 모친 곽낙원(郭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척결(剔抉)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변복(變服)한 일본인 중위를 살해하여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1907년에는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만세 시위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 등을 조직하고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등의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逝去)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追敍)하였다.

     

     

     

     

    김구와 교감하다.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첫 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노역의 현장

     
     
     
     

    노역 현장에서의 회고

     
     
     
     

    그리운 어머니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 인천 축항은 내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 백범일지 -

     
     
     
     

    나는 내가 못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나는 한 명의 국민이자,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 백범일지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의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

     
     
     
     

    첫 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脫籠眞好鳥(탈롱진호조)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拔扈豈常鱗(발호개상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求忠必於孝(구충필어효)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請看依閭人(청간의여인)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김주경이 보낸 탈옥을 권유하는 5언 절구 -

     

    김주경

    강화 출신의 김주경은 무관으로 청년 김구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법무대신 한규설을 만나 김구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청년 김구에게 탈주를 권유하는 위문편지를 보낸다.

     

    유완무

    유완무는 인천 지역에 용감한 청년 몇 사람을 모아

    청년 김구를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사흘 전에 김구가 다른 죄수들과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는 후에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로 고쳐주었다.

     

    박영문, 안호연

    인천 신상협회 창립 멤버로 인천항의 유명한 물상 객주였던 박영문은

    청년 김구의 어머니가 옥바라지를 할 수 있도록 거처와 일을 마련해 주었다.

    안호연 역시 김구와 모친을 극진한 정성으로 대하였다.

     

     

     
     

    물고기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라고 짐작하고 걸어갔다."

    - 백범일지 -

     
     
     
     

    노역(勞役)의 현장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 공사장에 일을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렸다.

    여기서 서대문 감옥 생활을 회고한다면 속담의 ‘누워서 팥떡 먹기라’

    불과 반일(半日:반 나절)에 어깨가 붓고 동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 백범일지 -

     

     
     
     

    인천 축항공사의 현장 모습

     

    인천항은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커서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개선하고자 추진된 것이 이중갑문식 선거(船渠)이다.

    출처 : 인천축항도록

     
     
     
     

    청년 김창수에서 민족지도자 김구로 단련되다.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원수를 갚고자

    1896년 황해도 안악 해안 지역인 치하포에 있는 주막에서

    당시 20세 청년이었던 김창수가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처단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생활로 인해,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불굴의 민족 지도자로 단련되었고,

    역사적인 사건의 순간에 함께했던 민중들이 있었으며, 그의 용기의 원천은 민중들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행정수반 초대 경무국장 김구

     

    1919년 3.1 운동 직후 탄생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우리 민족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으며, 독립운동의 중추 기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되기를 원하였으나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교민 보호와 임시정부를 지키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김구는 내무총장 등 국무위원으로, 또 국무령과 주석을 역임하면서

    27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리운 어머니 – 백범 김구의 가족

     

    청년시절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1949) 선생의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다.

    그는 21살이던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명분으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있던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였다.

    이것이 치하포 사건(鵄河浦 事件)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황해도 해주감영(海州監營)에 체포됐다.

    그에겐 도적질을 위해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그는 1896년 8월 초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그의 아버지(김순영), 어머니(곽낙원)도 인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겨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때 ‘청년 김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됐다.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청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수감되자 함께 인천으로 왔다.

    객주 박영문과 안호연의 집에 머물며 옷과 밥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 세 번 아들의 감옥에 밥을 가져다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백범 김구의 중국 임시정부 생활에도 독립운동을 끝까지 지원하고 격려하며

    민족의 스승을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아들 김창수(김구)가 치하포사건(鵄河浦 事件)으로 인천 감리서 감옥으로 이감되자

    곽낙원 여사와 함께 이주하여 아들의 옥바라지에 열중하는 한편,

    1897년부터 수차례 법무대신 한규설에게 청원서를 올렸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898년 3월 김창수가 인천 감옥을 탈옥한 이후 대신 감옥에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1901년 1월 사망하였다.

     

    김구(金九)와 교감(交感)하다.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모아 김구에게 전달하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

     

    김구는 독립이라는 소원에 일생을 바쳐 살았습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김구에게 말해보세요.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3가 8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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