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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白華道場 終南山 松廣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2. 1. 29. 20:14

    전북 유형문화재, 송광사 일주문(松廣寺 一柱門)

     

    이 건축물은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조선 중엽에 세운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3km 떨어진 '나드리'라는 곳에 있었으나

    절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점차 안쪽으로 옮겨지다가 1944년 해광(海光) 스님이 이곳에 세웠다.

    문의 좌우 측면에는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중심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에 연꽃을 조각한 보조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용머리 등으로 장식한 처마가 화려하며, 건물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멋을 풍긴다.

    일주문에는 '입차문래자 막존지해(入此門來者 莫存知解)'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일주문을 들어오는 사람은 세속적인 생각,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며 불법에 귀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주문에는 자신이 간직한 불성의 씨앗을 개발하여 스스로 부처의 길에 이르고

    동시에 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일불승(一佛乘) 사상이 담겨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송광사 금강문(松廣寺 金剛門)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면서 일주문을 지나 그 다음으로 만나는 이 금강문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이다.

    금강문은 인왕문(仁王門)이라고 부르며, 문 양쪽에는 손으로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杵) 또는 칼, 창을 손에 든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셨다.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셨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안금강역사(阿金剛力士),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吽金剛力士)라고도 부른다.

    이 금강문을 지나면서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쳐부수어 완전한 행복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이 있다.

     
     
     
     

    송광사 천왕문(松廣寺 天王門)

     
     
     
     

    보물,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完州 松廣寺 塑造 四天王像)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조각승 여인(呂仁)과 금산(金山) 등이

    인조 14년(1636)부터 13년에 걸쳐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위험에 빠지자

    전국 여러 사찰에서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사천왕 신앙의 가피를 널리 구하였다.

    사천왕은 지혜의 보검을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이 동방세계를,

    불탑과 정법의 깃발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서방세계를,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남방 세계를,

    비파를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북방 세계를 관장하면서

    그곳 중생들의 선악업보(善惡業報)를 면밀하게 살펴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을 정해준다.

    사천왕상의 크기는 425cm이며, 무인 같은 체형에 자비로운 보살의 용모와 형상을 하고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검, 창, 용과 보주 깃발과 불탑을 손에 쥐고,

    악귀를 발로 짓누르는 사천왕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송광사의 소조 사천왕상은 소조상의 제작 기법과 사천왕상의 신체적인 특징,

    균형감, 조형성 등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사천왕상으로 평가된다.

    1994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조사할 때 사리, 보석, 약재 등을 넣어두는 후령통(候鈴筒)과

    사천왕상 조상(彫像)에 참여한 시주자(施主者) 명단,

    다수의 고려시대 목판본 경전, 충지 등이 복장유물로 발견되었다.

     

     
     
     

    신축 중인 종각(鐘閣)

     
     
     
     

    포대화상(布袋和尙)

     

    중국 명주(明州) 봉화(奉化) 사람, 혹은 정정(長汀) 사람이다.
    오대(五代) 시대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으로 성씨와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단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는 장정자(長汀子)이다.
    세간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알려졌다.

    몸은 비만하고 긴 눈썹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동냥을 하고, 어떤 때에는 어려운 중생을 돌봐주기도 했다.
    중국 민간에서는 혜비수(惠比壽), 대흑천(大黑天), 비사문천(毗沙門天), 수노인(壽老人),

    복록수(福祿壽), 변재천(弁才天)과 더불어 ‘칠복신(七福神)’으로 받들어진다.

     

     

     

     

    지장전(地藏殿)

     
     
     
     

    보물,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 松廣寺 大雄殿)

     

    완주 송광사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 9포 팔작지붕으로 된 단층 건물이다.

    승명 선사가 그 스승인 각성 선사의 지도 아래 1623년에 법당 터를 마련하고

    15년 동안 간고의 노력을 기울여 1638년에 앞면 7칸, 옆면 5칸, 2층 규모의 불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사세가 열악해져 원래의 웅장한 건물을 유지하지 못하고

    1857년에 정일 선사가 지금의 규모로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개축할 당시 대웅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위규 선사는

    “비에 씻기고 바람에 갈리어 법당은 허물어지고, 날과 달이 감에 따라 불상은 빛이 변하여 검어졌다.

    광경이 이렇게 처참함을 차마 볼 수 없다. 차라리 내 발이 닳아 없어지고 이 몸이 다 부서질지라도

    이 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이생을 그만두겠다.”라고 썼다.

    참담해진 기존의 대웅전을 해체하는 데에는 53명의 장인이 49일 동안 동원되었고,

    현재의 단층 불전으로 다시 고쳐 짓는 데에는 7개월이 걸렸다.

    당시 작업을 주도한 정일 선사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심정으로 공사를 마쳤다.”라고 했다.

    송광사 대웅전의 사면에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 데

    정면은 대웅전(大雄殿), 오른쪽은 유리광전(琉璃光殿), 왼쪽은 무량수전(無量壽殿)

    후면은 보광명전(普光明殿)이 걸려있다.

     
     
     
     

    천진동자불(天眞童子佛)

     
     
     
     

    세심정(洗心亭)

     
     
     
     

    전북 유형문화재, 송광사 나한전(松廣寺 羅漢殿)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이다.

    각 지주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팔작지붕이고, 우물천장이다.

    내부에는 목조의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16 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2구, 동자상 2구, 사자상 2구가 있다.

    이 나한전 건물은 조선 제17대 효종 7년(1656)에 벽암, 각성 대사가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한 것이며, 1934년 해광스님이 중수한 것이다.

     
     
     
     

    석조 미륵대불입상(石造 彌勒大佛立像)

     
     
     
     

    삼성각(三聖閣)

     
     
     
     

    보물, 완주 송광사 범종루(完州 松廣寺 梵鐘樓)

     

    완주 송광사 종루는 십자형 평면 위에 다포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올린 2층 누각으로, 이러한 구조는 국내에서 유일한 예이다.

    송광사 종루가 언제 건축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법당초창상층화주덕림(1725)"에 송광사의 건축물로 ‘종각’이 언급되어 있고

    이옥의 "사관"에도 ‘고루’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임진왜란 이후 송광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종루의 아래층은 모든 면이 지면에 닿아 있고 위층은 마룻바닥에 난간을 두르고 있다.

    누각 중앙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범종을 달았고,

    사방으로 돌출된 공간에는 수중 생명을 위한 목어,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운 판,

    땅 위에 살고 있는 중생을 위한 법고 등을 달았다.

    이 네 가지 법구를 가리켜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하루에 세 번, 새벽, 정오, 저녁에 울린다.

    완주 송광사 종루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작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한국 전통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 고루 : 큰 북을 달아놓은 누각

     

     
     
     

    송광사 종무소(松廣寺 宗務所)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白華道場 終南山 松廣寺)

     

    석가모니(Sakyamuni, BC 624-544)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연기를 깨달아

    중도(팔정도)의 가르침으로 5비구를 교화한 이래, 불교의 역사적 전통이 가꾸어온

    모든 사상과 문화, 제도 등은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광사(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말사)도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곳이다.

     

    송광사는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 좋게 뻗어오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선(終南, 종남),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 끝자락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찍이 백제 때 종남산 남쪽에 영험한 샘물이 있어

    그곳에 절을 짓고 백련사(白蓮寺)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에 의해 송광사로 개칭되었다.

    체징 선사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도의(道義, 821) 국사의 수법 제자인 염거(廉居, 844) 화상을

    스승으로 수행하다 선법(禪法)의 요체를 구하러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에 머물렀다.

    유학하고 귀국한 후에도 가지산 보림사(전남 장흥군)와

    이곳 종남산 백련사를 오가면서 도의 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하였다.

    백련사가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소나무는 독특한 향이 있어 다른 식물과 함께 어울려 생장하지 않는다.

    어떤 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소나무가 생장하기 시작하면 금세 소나무 일색이 되고 만다.

    선종도 그와 같아,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등 불교의 가르침이 토착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종이 전래되고 나면 선종 일색이 되고 만다.

    이를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松廣)는 선종의 비유어로 백련사를 송광사(松廣寺)로 바꾼 것이다.

     

    이래로 송광사는 선종 사찰로서 사격을 면면히 이어왔다.

    고려 중기에 대각 의천(義天, 1055-1101) 국사가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였을 때에는 송광사를 다시 백련사로 고치고

    여타의 선종 사찰과 함께 천태종에 귀속되었다.

     

    임진 정유(壬辰 丁酉, 1592~1598) 양난으로

    전라 충청 지역의 사찰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을 때 백련사도 전소되었다.

    다행히 전란이 마무리된 후 조정에서 전소된 절들을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어나,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대사의 문도인

    덕림(德林) 화상이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득순(得淳), 홍신(洪信) 등과 더불어

    간고 끝에 시범사찰로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全州 松廣寺開創之碑)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조(재위 1623~1649)의 척족인 완산인 이취반(李就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사유하고 있다가

    절에 다시 기증하였고, 1622年부터 2년간에 걸쳐 전면 7간 측면 5간 중층의 웅장한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송광사 대웅전의 낙성과 삼존불의 점안은 당대의 최고 도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진묵(震黙, 1562~1633) 대사가 직접 증명법사로 참여해 법회를 주관할 정도로 당대 불교계의 큰 경사였다.

     

    불교계 선문의 장로들은 벽암 대사야말로 선단(禪壇)을 주관하여 법등을 사자상승시켜 나갈 적임자로

    여기고, 무주 적상산에 머물던 대사를 찾아가 송광사에서 교화의 법석을 펼쳐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벽암 대사는 장로들의 청을 받아들여 송광사로 옮겨와 무진 법문으로 교화하고,

    체징 선사의 선수행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송광사라고 다시 고쳤다.

    이에 인조는 송광사를 조선선종수사찰(朝鮮禪宗首寺刹)이라고 사액하였다.

     

    이후 명부전(冥府殿, 1640), 천왕전(天王殿, 1649), 나한전(羅漢殿, 1656),

    일주문(一柱門) 등을 차례로 복원하여 선종 수사찰로서의 사격을 온전히 갖추었다.

    이를 두고 개창비는 “전각은 크고 높고, 곁채는 길게 뻗었으며, 층층이 높은 건물을 드러내고,

    사방에 담장을 둘러싸니, 높은 것은 하늘과 만나고, 내려 보면 냇물에 담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광사는 1707年, 1814年, 1857年에도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특히 송광사 대웅전 중건 상량문(1857)에 따르면,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金炳喬),

    관찰사 심경택(沈慶澤), 전주 부윤 홍종화(洪宗和) 등이 백만 전을 지원하여

    이층 구조의 금당(대웅전)을 49일 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 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축소하여 중수하였다.

    이러한 송광사 사적 전말은 全州松廣寺開倉之碑(1636), 庚辰年七月日西方山松廣寺十王造成訖功記(1640), 佛像造成施主目錄(1641), 大靈山十六聖衆五百聲聞造成會願文(1656), 石槽造成記(1670),

    虎溪橋重修有功記(1681), 三殿牌重修記(1792), 前嘉慶十九年甲戌法堂重修同參記(1814),

    松廣寺大雄殿重建上樑文(1857), 松廣寺法堂初創上層化主德林(연대 미상) 등에 상세하게 전해온다.

     

    대웅전(보물 제1243호)에는 소조 삼존불상(석가여래불, 아미타여래불, 약사여래불, 보물 제1274호)과

    목조삼전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가,

    지장전에는 소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권속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이,

    나한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에는 목조석가여래 삼존상과 십육나한상 및

    그 권속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이,

    범종루(보물 제1244호)에는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등 사물(범종, 운판, 목어, 법고)이,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천왕전에는 소조 사천왕상(보물 제1255호)이 봉안되어 있다.

    그밖에도 재가자들의 납골을 안치하고 있는 극락전과 금강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일주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삼성각 등의 전각이 있다.

    당우로는 약사전, 첨성각, 감로당, 향로전, 보현당, 적묵당,

    사운당, 인경당, 응향각, 보경당, 다래헌 등이 있다.

     

    송광사에는 회주 도영 대종사를 중심으로

    사부대중이 중도의 선양을 위해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고 있다.

    재가자들은 송광사 신도회를 조직하여 산하에 송광사 청년회, 전라북도 불교발전협의회,

    송광사종남회, 송광사지장회, 송광사 일요가족법회운영위원회,

    송광사 불교학당, 송광정심원불자회 등 신행단체를 두고 있다.

    그밖에도 송광사는 송광정심원과 완주 떡메마을, 송광 백련마을 등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지세를 다듬고 그 터에 당우를 세우는 일은 중도의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함에 있다.

    송광사는 관세음보살의 상주 설법도량(백화도량)인 만큼 법륜이 쉼 없이 굴러

    부처님의 지혜가 더욱 빛나고,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 부드럽게 화합하여

    그들에게 평온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 주지 백강법진 스님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대흥리)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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