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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순국숭모비(明成皇后 殉國崇慕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3. 7. 21:09

     

    明成皇后 殉國崇慕碑(명성황후 순국숭모비)

     
     
     
     

    아아 세계만방 역사 속에 어찌 이 같은 통분한 일이 있으랴

    우리 겨레 모두는 천만년이 지나도 이 면면한 한을 잊을 수 없다.

    이곳 녹산(鹿山)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배위되시는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께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왜적의 손에 처참하게도 순국하신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지난 뒤 1895년 을미(乙未) 양(陽) 10월 8일 새벽에

    왜제의 사주를 받은 왜인 폭도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무엄하게도 궁성을 포위하고

    곤녕합(坤寧閤)으로 침입하여 황후를 시해(弑害) 한 후 다시 이불에 옥체를 싸서

    이곳에 옮겨놓고 석유에 불을 질러 시신마저 없이하여 흔적조차 없게 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다 인류 역사상에 어찌 이러한 만행이 있으랴

    항상 동양평화를 가장하는 저들이 전쟁도 아닌 터에 남의 나라 궁중으로 쳐들어와서

    국모(國母)를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옛일을 생각하면서 이곳 녹산에 오르니 주먹으로 가슴을 처 울분하면서

    어서 우리의 힘으로 세계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해야 하겠다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명성황후께서는 지나치도록 총명 영리하신 여걸이셨다.

    황후가 되신 후에 항상 춘추좌전(春秋左傳)을 공부하여 정치와 역사를 연구하셨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쇄국 정치에서 문화개방이 되니 동북아세아의 요새지대인

    우리 국토는 마치 이리떼들이 침을 흘리는 고깃덩이와 같았다.

    이중에도 이웃나라 중국·로국·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각축전(角逐戰)을 벌였다.

    영특한 명성황후는 탁월한 외교수단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써서

    용이하게 왜국에게 이권을 주지 아니했다.

    왜적은 앙앙불락 해서 마침내 우리 국모를 시해한 후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을 강제로 체결해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다음 다섯 해 후에는 경술합방(庚戌合邦, 1910년)을 선포하여 마침내 망국의 비운을 당하게 되었다.

    만약 명성황후께서 왜적의 손에 시해되시지 아니했던들 당시의 나라 형세는 크게 달려졌을 것이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건립위원 일동은 황후께서 가신지 84주년을 맞이하여

    황후의 애절하신 순국을 추모하면서 비를 세워 이 사실을 천만대 젊은 분들에게 전한다.

    1979년 10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건립위원회 세움

    비문 월탄 박종화

    조각 민복진

    글씨 일중 김충현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명성황후는 개화기에 개혁을 추진하던 중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하였다.

    1981년 건청궁 내 동쪽 구릉지에 건립하였던 이 숭모비는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인하여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제112주기를 맞이하여

    2007년 10월 8일 현재의 위치를 이전 설치하였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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