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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3. 14. 21:08

    세종대왕릉 - 영릉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 (왕대리)

     

     

     

     

     

    조선왕릉 세계유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릉(영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유적임을 인정함.

    등재일자 : 2009. 6. 30.

    유네스코 사무총장

     
     
     
     

    새로 복원한 영릉 재실(英陵 齋室) - 세종대왕릉 제 모습 찾기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영(종 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능 관리자(참봉 및 령)가 집무를 보는 곳인 재방(齋房),

    제향을 올릴 때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제향에 쓰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제향에 쓰이는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곡물 등을 보관하는 창고인 곳간채(庫間),

    대문, 하인방, 창고 등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2006년과 2017년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 후기의 문헌인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과 ‘춘관통고(春官通考)’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2018년에 착공하여 2020년에 복원하였다.

     

     
     
     

    구 영릉 재실(舊 英陵 齋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 종 9품)과 영(令, 종 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祭官)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방(齋房),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와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재실이 소실되어 1971년 영릉 성역화사업 때

    현 위치에 삼문(三門)과 행랑, 재방 안채만 복원되었다.

    현재 원래의 재실이 본래 위치에 복원(2020년 신 재실 복원)되어 있다.

     

     
     
     

    연지(蓮池) - 지당(池塘)

     

    조선시대의 풍수지리 사상은 음택(陰宅) 풍수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왕릉의 연지(蓮池) 조성과도 연관이 있다.

    옛사람들은 양택인 경우에 그 혈장(穴藏)이 넓어야 하고

    음택인 경우에는 혈장이 꽉 짜이게 입구가 좁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왕릉의 입구는 오므라진 산세를 하고 있는 곳이 많다.

    오므라들지 않은 곳은 기(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숲과 연못[池塘]을 조성하기도 했다.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는 왕릉의 입구에 위치한 돌다리로 왕릉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금천교를 경계로 속세의 영역과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나누어지며

    금천교를 건너는 순간 신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릉의 금천교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 오라’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뜻하는 작은 시내를 말한다.

    2008년 5월에 복원하였다.

     
     
     
     

    영릉 홍살문(英陵 紅箭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紅箭門, 홍전문),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향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박석(薄石, 얇은 돌)이 두 줄로 넓게 깔린 길을 말한다.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하였으나 문화재청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왜곡된 왕릉 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香御路)로 변경하였다.

    왼쪽은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 신(神)이 가는 길이라 ‘향로(香路·神路)’라 하고,

    오른쪽은 제향을 드리러 온 왕 또는 제관이 가는 길이라 ‘어로(御路)’라 한다.

    관광객 및 방문객은 어로를 이용해 걸어가야 한다.

    좌측의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90m)이나 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판위(版位)

     

    능의 출입문 격인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가로 세로 각 1.5m 정도의 사각형 자리가 있다.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제관(祭官)들이 도착하였을 때

    사배(四拜)로써 인사를 드리고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곳이다.

     
     
     
     

    사적,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영릉은 조선 4대왕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능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종 18년에 왕위에 올랐다.

    32년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해시계, 혼천의,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 발명,

    집현전 설치, 아악 정비,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활자 제조 및 농업 장려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분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낳은 후,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능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 안에 모신 무덤)으로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상석은 2개 배치하였다.

    ※ 능침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를 모셨다.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과 제사를 준비하는 관노(官奴),

    하급 관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전 일곽 중 가정 소박한 건물이다.

    수직방(守直房)이라고도 하며, 통상 정자각(丁字閣) 동남쪽에 놓여

    제사 때 제관의 대기와 준비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 원형 복원하였다.

     
     
     
     

    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 祔左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

     

    영릉 비각(英陵 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자취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나 표석(表石)을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다.

    영릉 비각 안에 있는 영릉 표석은 영조 21년(1745)에 세운 것으로,

    표석 앞면의 글은 조상경(趙尙絅)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학(李壆)이 썼다.

     
     
     
     

    영릉비(英陵碑)

     

    세종대왕릉(英陵)은 원래 광주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으로 천장 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英陵碑)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1745년 영조 21년에 세웠고, 비각도 이때에 건조되었다.

    비문에는 ‘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 祔左(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영릉 비문(英陵 碑文) - 번역문

     

    세종(世宗) 장헌(莊憲)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홍무(洪武) 30년(정축년 1397) 4월 10일에 탄생하여,

    영락(永樂) 16년(무술년, 1418)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경태(景泰) 원년(경오년, 1450) 2월 17일에

    승하(昇遐)하여 (같은 해) 6월 광주 헌릉 서쪽언덕에 장사 지냈다.

    성화(成化) 5년(기축년, 1469) 3월 6일에 여주 서북성산 자좌(子坐, 북)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는 32년 나이는 54세이다. 명나라에서 장헌의 시호를 내렸다.

     

    왕비 선인제성 소헌왕후 심씨(宣仁齊聖 昭憲王后 沈氏)는

    홍무(洪武) 28년(을해년, 1395) 9월에 탄생하여

    영락(永樂) 16년(무술년, 1418)에 경빈(敬嬪)에 책봉되었고

    얼마 있다가 공비(恭妃)로 진봉(進封, 호칭을 높여 줌)되었다.

    선덕(宣德) 7년(임자년, 1432)에 왕비(王妃)로 호칭을 고쳐서 봉해졌고,

    정통(正統) 11년(병인년, 1446) 3월 24일에 승하하였다.

    (같은 해) 7월 헌릉 서쪽언덕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 3월 6일에 대왕릉과 같은 언덕에 이장(移葬)하였다.

    나이는 52세이다.

    숭정 기원 후 118년(을축년, 1745)에 세우다.

     

     
     
     

    정자각(丁字閣)

     

    건물 바닥 평면이 '정(丁)'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이 세 건물은 제향 봉행(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다.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향어로(香御路)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의 신로(神路)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 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 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수라간(水剌間)

     

    제향 음식을 관리하는 건물로 수복방의 맞은편에 있다.

    주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영릉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여주로 천장 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영릉의 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 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세종(世宗, 1397 ~ 1450, 재위 기간 1418 ~ 1450)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 1446)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 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 하여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승봉(陞封)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영릉 어구(英陵 御溝)

     

    어구는 능역의 조성물로 능이나 궁궐 안에서 흘러나오는 개천(開川)이다.

    이곳 합수 어구(合水御溝)는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 능침(陵寢) 주변에 위치한

    동측 어구와 서측 어구가 만나 물이 흐르는 곳이다.

    2018년 문화재 발굴조사 중 문석인(文石人), 비석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능역 조성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문석인 제작과정 중 남은 것을 어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어구 복원정비에 활용되어 찾아볼 수 있다.

    ※ 문석인(文石人) : 관복을 입고 능 주인을 보좌하는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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