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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독립운동의 성지(聖地), 대각사(大覺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2. 4. 1. 20:14

    大韓佛敎 曹溪宗 大覺會 總本山 大覺寺(대한불교 조계종 대각회 총본산 대각사)

     
     
     
     

    대각사 범종각

     
     
     
     

    대각성전(大覺聖殿), 용성선원(龍城禪院)

     

     

     

     

    용성(龍城) 스님 거주터(居住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불교 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白龍城, 1863~1940) 스님이 활동하던 곳.

     
     

    백용성 선사

     

    백용성 선사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백남현 거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규며, 출가 후 법명을 용성이라 하였다.

    어릴 적부터 선사는 불교에 마음이 끌려 승려가 되기를 원하였다.

    아버지 백남현 거사는 아들 상규를 1879년 해인사 극낙암 화월 대사에게 보내어 낙발하였다.

    스님이 된 후 강원에서 수학하고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진하여

    23세에 깨달은 바가 있었고,

    44세에 중국 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47세에는 귀원정종과 대각교 의식집 등 수많은 저술을 하고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등 많은 경전을 번역, 간행하였고,

    한국불교 최초의 역경 사업을 펼쳐 불교 경전의 한글 대중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역경불사와 아울러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를 세우고 불교와 민족 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큰 등불이 되셨다.

    용성 조사는 1910년 지리산 칠불암 선원에서 안거 하던 중

    나라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오셨다.

    그 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만해 한용운 선사와
    김구(법명 원종이다.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4년 하였다.) 선생 등을 만나

    나라를 구하는 구체적인 논의를 하였다고 하였다.

    대각사는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는 곳으로 열혈청년들과

    구국열사들의 비밀 통로 역할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한용운 선사를 통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국독립의 길을 닦으셨다.
    이후 1919년 3월 1일 명월관에서 33인이 독립운동 선언을 하였고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 독립운동 성지(聖地), 대각사

     

    대각사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용성(龍城) 스님이 세운 절이다.

    용성(龍城) 스님은 48세인 1911년부터 1940년까지 빼앗긴 조선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열반(涅槃)하실 때까지 민중의 깨우침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전체를 다 던지고 거기에 전념하였다.

     

    용성 스님은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서울 사동에서 선불교 교화사업을 맡아 일하며 봉익동 1번지 일대를 사들여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를 세우고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12년 이때 김구 선생의 나이는 32세, 용성 스님은 49세이다.

    1919년 김구 선생은 해주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인천감옥으로 이관되고 거기서 탈옥한다.

     

    그리고 대신 부모가 투옥되고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그해 늦가을 마곡사(麻谷寺)에서

    스님이 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고 3년을 거기서 수행하였다.

    금강산 평양 대보산 영천암 등에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환속(還俗)하게 된다.

    그 후 원종 김구 선생은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용성 스님이 있는 대각사에 머물며

    용성스님의 영향을 받아 우리 민족을 살릴 대원(大願)을 세우고

    보현행원을 실천할 행자가 되기를 스스로 다짐하였다.

    후에 김구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고

    용성 스님은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곤 하였다.

    용성스님은 1916년 봄 만해(卍海) 스님을 불러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주 묻곤 하였다.

    만해 선사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대각사에 머물면서

    용성 스님께 시국 돌아가는 말씀을 나누고 차후 거사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때쯤 손병희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물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에 밀사를 보내 독립운동을 하고

    또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조선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할 때였다.

    용성 스님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 참여하였고,

    이것을 문제삼아 2년여간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다 치렀다.

    출소 후 용성 스님께서는 경전 번역과 전법, 그리고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경남 함양의 화과원(華果園) 운영, 만주 용정에 27만여 평의 농지를 구입하여

    화과원을 운영, 잉여농산물은 모두 독립자금과 만주 독립군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 일로 후일 1931년에는 대각사가 일본조선총독부에

    재산 몰수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조선박해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조선해방을 하였다.

    그러나 용성 스님은 끝내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에 대각사에서 열반하시었다.

    다비식(茶毘式)은 일본 경찰의 철저한 방해와 수색 검열 등으로

    제자 몇분만이 스님의 다비식을 조촐하게 치렀으며 스님의 사리탑은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다.

     

    이곳 대각사는 용성 조사님 전법과 열반의 땅이며, 3.1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대각사(大覺寺)

     

    대각사는 1911년 용성(龍城) 스님이 대각교(大覺敎)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창건하였는데,

    용성 스님의 포교 정신은 훗날 대각회(大覺會)로 이어졌다.

    창건 이후, 용성 스님의 대각교는 이곳을 중심으로 확장해 192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각 일요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선회(禪會)가 개설되었으며,

    1930년에는 대각성전(大覺聖殿)과 요사가 새로 지어지기도 했다.


    그 뒤 1939년 조선불교 선종총림, 1944년에 다시 경성포교당 대각선원 등으로 사찰명을 바꾸었다.
    이 무렵 대각교가 대각사를 중심으로 민족 자주성을 일깨운다고 판단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본격적인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대각사는 1945년 12월 12일에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요인의 귀국을 환영하는

    귀국 봉영회가 마련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 와서는 1969년 완규(完圭), 동헌(東軒)을 비롯한 용성 스님의 제자들이

    대각교 창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재단법인 대각회를 대각사에 설립하였으며,

    1986년 경내에 있던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총 건평 400평의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10길 87 (봉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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