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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경모궁 지(景慕宮 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2. 20:10

    사적, 경모궁 지(景慕宮 址)

     

    규모(면적) : 지정면적 4,142㎡

    함춘원이 있었던 터이므로 ' 함춘원지(含春苑 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나,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석단(石壇)은 경모궁의 유적이며 함춘문(含春門)만이 함춘원에 관련된 유적이다.

    궁궐의 후원(後苑)으로서 성종 때(1470~1494)에 조성되어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기 전까지는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으며

    이 원유(苑囿)를 가꾸기 위하여 주변의 민가, 가묘 등을 거의 다 철거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1623~1649)에 와서는 그 절반을 떼어서 말을 놓아 기르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다시 1764년(영조 40)에는 이곳에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墓)를 옮겨지었다고 하는데,

    이때에는 아마도 방마장(放馬場)을 제외한 나머지 땅에다 지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함춘원과 경모궁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그려져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서도 함춘원이 경모궁의 서쪽 담장과

    서로 접하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조선 전기까지는 창경궁 앞 동쪽 언덕이 모두 궁궐의 원유인 함춘원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일부는 말을 기르는 곳으로 사용된 함춘원이 되고,

    일부는 사도세자의 사당이 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경모궁에서 시행되는 의례를 정하는 동시에 건축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춘원도 새롭게 정비되었던 것이다.

     

    경모궁은 1839년(헌종 5)에 불탔으나 곧 중건되었고,

    광무 3년 (1899년)에 장조(莊祖, 사도세자에게 올린 존호)의 신위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경모궁도 경모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광무 4년 (1990년)에는 경모궁 터에 6성조 즉

    태조, 세조, 성종, 숙종, 영조, 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永禧殿)을 옮겨 세웠다.

    그뒤 함춘원과 경모궁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는데,

    1973년에야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기 시작하였다.

    한편 사료상으로는 경희궁에 부속된 후원도 모두 함춘원으로 되어 있으나,

    경희궁 후원의 본 이름은 방림원(芳林苑)이다.

    함춘원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물 중 하나이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함춘문뿐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28-2 일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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