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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성이씨(陽城李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2. 4. 13. 04:10

    양성이씨 상징 조형물

     

    작품명 : 양성인이여 깨어나라

    작가 : 배정문

     

    양성이씨 조형물은 9개파의 높은 기상을 아홉 개의 덩어리로 표현함으로

    기상과 후대에 문중의 발전을 표현하고 선대의 업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조형물의 정면의 부분은 오얏 꽃의 개화 형상을 단순화하여

    문중의 번영과 화합을 다짐하며, 중앙 위에 양성이씨 마크를 표현하였다.
    하단은 양성이씨의 억겁의 뿌리를 나타내어 문중이 표현하고자 하는 유래를 바탕에 둔 작품이다.

     

     

    양성이씨(陽城李氏) 창씨 유래

     

    양성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조(1046~1083) 때

    삼중대광 보국(輔國)의 벼슬과 양성군(陽城君)의 군호를 받아 득성하였다.
    시조 이수광은 고려 문종조 때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 겸전한 인품으로

    상호 이해와 설득과 무마로 동침 야욕을 봉쇄하고 선린 우호관계를 맺어

    나라를 안연(安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출장입상과 덕망이 높아

    당시 세인들이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다.
    송나라가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 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매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고려 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 후세(名揚後世)하리라”라고 써주시고,

    특진금오위대장군(特進金吾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의 작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이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에 연유되었다.

    시조의 유지(遺祉)가 양성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표지(標識)가 없어 실전했다.

    양성은 고구려 때 사복흘(沙伏忽), 신라 때 적성(赤城),

    고려 초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 안성시 양성면과 평택시 죽백동 일원의 옛 지명이다.
    현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 유좌 지원에 1848년 헌종 14년 시월,

    시조 휘 수광의 단과 5세위까지 설단하였다.

    1984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산 20 무갑산 능골에서

    4세 부마공(駙馬公) 휘 영주(英柱), 배위 순정공주(順正公主),

    계배위 정씨의 묘소를 시조단하에 천묘하였고,

    2013년 11월 3일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중용리에 묘소가 위치한

    6세 석탄공(石灘公) 휘 수방(守邦)의 단비(壇碑)를 추가 설단하여

    명실상부하게 시조 묘역을 성역화하고, 매년 음 10월 1일 세향을 받들고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 뿌리공원로 47 (안영동) 중구 효문화마을관리원 뿌리공원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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