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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를 건너 온 돌사람, 고국의 품에 안기다.
    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22. 4. 27. 20:10

    문인석(文人石)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앞에 한 쌍식 세워,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이다.

    공복(公服) 차림의 문관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량관(金梁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다.

    능묘 주위에 문인석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 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문인석은 당시의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우리나라 능묘 제도의 변천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시관에 있는 대부분의 문인석은 짝이 맞지않는 모습이다.

    처음에 일본으로 팔리거나 밀반출 되었을 때에는 짝을 이루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여기저기 팔려다니며 짝을 잃어버리고 혼자 한국 땅에 돌아온 것이다.

    따라서 환수유물관은 다시 찾아온 유물을 전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건너간 문인석들은 현재에도 일본의 교토 국립박물관,

    도쿄의 네즈 미술관의 정원에 다수가 전시되어있다.

    앞으로 우리옛돌박물관은 일본 및 해외에 있는

    석조 문화재 환수에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다.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

    2001년, 종이에 먹, 200mm × 233.6mm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려운데
    汝爾何山鳥(여이하산조) 너는 어찌 산에 사는 새가
    來參鳳凰群(래참봉황군) 봉황의 무리에 끼어들었는가.

    四溟大師(사명대사, 1544-1610)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사는 학으로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노닐었느니라.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어느 날 아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하여 여기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이 시는 사명대사가 선조(宣祖)의 명으로 1604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포로 송환을 위한 회담을 시작하면서 주고받은 한시이다.

    도쿠가와가 자신과 일본을 봉황(鳳凰)으로 비유하고

    사명대사와 조선을 닭(鷄)의 무리로 비유하자,

    사명대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은 오히려

    본래 청산에 노니는 고고한 학(鶴)이었으나

    갑자기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오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도쿠가와 당신과 일본이야말로 천한 닭(鷄)의 무리라고 회답하여

    상대의 기를 꺾어버린 유명한 시이다.



    이 한시는 세중옛돌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및

    재일본 유출 문화재 환수기념식(2001년 7월 1일)에서

    김종규(金宗圭)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이 축사를 하면서

    박물관 설립자의 선행이 마치 사명대사가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와 담판을 하여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 백성들을 본국으로

    송환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용되었다.

     
     
     
     

    소나무 – 배병우 작

     

    “동해의 양양해변을 따라 남하하면서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소나무’를 봤다.

    그 후 반도 여러 솔숲과 밭을 전전했고, 설악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 그윽한 솔향을 음미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반도 등뼈인 태백산맥의 피와 살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특유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배병우의 작품 속 소나무는 교차하듯

    구불구불한 형상을 하기도 하고, 수직으로 강렬하게 뻗기도 한다.

    이른 새벽 장엄한 안개에 휩싸인 소나무에는 성스러움과 함께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담겨있다는 경주 경애왕릉의 소나무를 찍은 것으로,

    그는 왕릉의 소나무를 왕의 영혼이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뜻을 가진

    경배의 나무이고, 우리가 벨 수 없는 나무라고 설명한다.

     
     
     
     

    홀(笏)

     

    ​문인석에 새겨진 패는 '홀(笏)'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 관복이 제정된 때부터

    조선말까지 벼슬아치가 임금을 알현(謁見)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것이다.

    원래는 임금 앞에 나아가 여쭐 말씀이나 이르시는 말씀을

    붓글씨로 메모했다 지울 수 있게 만든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의례적으로 들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홀은 약간 굽은 것으로 33cm 정도의 장판(長板)에

    너비는 아래가 5cm, 위가 3.5cm 정도였고, 밑부분의 손으로 잡는 데는 비단으로 쌌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의장(儀章)에 의하면

    1~4품까지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에 상아홀(象牙笏),

    5~9품까지는 나무(木), 향리 공복에도 나무로 제정하였다.

    홀은 보통 보관할 때 홀대(笏袋)라고 하여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석상과 석인의 제한 규정

     

     

     

     

    바다를 건너 온 돌사람, 고국의 품에 안기다.

     

    문인석은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조각이다.

    천 년간 한결같이 능묘를 지켜온 문인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거나 헐값에 팔려나갔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중 천신일 회장은 “거듭된 전란으로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아오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집념으로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 환수에 힘을 쏟았다.

    2000년 서울의 한 모임에서 많은 석조유물을 소장한

    일본인 쿠사카 마모루(日下 守)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일본으로 그를 찾아가 설득하며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1년 그의 소장품 중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 기술이 우수한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등 70점을 환수하였다.

    우리옛돌박물관 제1전시관인 환수유물관에서는

    환수 유물 70점 중, 문인석 47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의 분위기는 어둡고 경건하게 꾸며졌다.

    기존의 전시 방식에서 탈피하여 돌을 응집하여 전시함으로써,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이 땅에 돌아온 한국 돌의 힘과 위엄을 보여주며 묵직함을 넘어선 압도감을 보여주고 있다.

    칠레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MoaiStatues),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웅장한 돌문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대사관로13길 66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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