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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묘(古堂 曺晩植 先生 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6. 18. 20:03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묘

    배위 전선애 합장

     

    묘소 위치 :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묘역 11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883~1950)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김씨(鎭江金氏)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부터 22세까지

    평양성내상점에서 일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M.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 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 조선인 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 군정 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 철수 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遺髮)이 안장되었다.

    서울 능동어린이대공원과 경기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서울 중구 저동2가 4번지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210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고당 선생 말씀 중에서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가자.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1911년 동경 한인 유학생 친목회에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모양이나 값에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조선물산을 애용해야 된다는 정신으로 우리의 것을 써야 한다.

    거기에 비로소 우리의 살길이 열린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며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에서 나시었다.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 후

    많은 독립지도자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활동을 하셨다.

    강서 모락장 3.1만세운동 후 투옥되었고 정주오산학교장, 평양 YMCA 총무, 조선물산 장려회 창립회장,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 숭인상업학교설립이사장, 관서체육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며 민족을 일깨우고 일제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펴셨다.

    해방 후 북한민족영도자로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려고

    소련군정과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북한동포를 버리고 나만 월남할 수 없다던 결심을 선생은 죽음으로 지키셨다.

    그것이 1950년의 일이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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