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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군 중장 이종찬의 묘(陸軍 中將 李鐘贊 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6. 20. 20:05

    육군 중장 이종찬의 묘(陸軍 中將 李鐘贊 墓)

    배위 표자영(表滋永) 합장

     

    이종찬

    계급 : 육군 중장

    군번 : 15108

    사망일자 : 1983. 2. 10

    안장 일자 : 1983. 2. 14

    묘역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묘역 1

     
     
     
     

    이종찬(李鐘贊, 1916~1983)

     

    1916년 3월 10일 경상남도 창원군(현 창원시) 출생으로,

    원적(原籍)은 경성부(京城府)이며, 경성에서 성장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28년 경성사범학교 부속 보통학교,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3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했으며,

    1937년 6월 본과를 제49기로 졸업한 후 11월 일본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 일대로 파견되어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1938년 중위로 진급했다.

    1940년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 진급과 동시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勳六等)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42년 2월 조선인 장교로는 유일하게 공5급(功五級) 욱6등(旭六等) 금치훈장(金鵄勳章)을 받았다.

    1942년 도쿄의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校)에서 수학하다가 12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뉴기니(New Guinea)에 파견되어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 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같은 해 12월 육군 공병 소좌로 진급해 1944년부터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뉴기니에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8월 귀국했다.

    1949년 6월 육군 대령으로 임관해 국방부 제1국장 겸 정훈국장을 맡았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수도경비사령관, 9월 수도경비사령부 제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6월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파병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해,

    7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후 미육군지휘참모대학(CGSC,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에 유학했으며,

    귀국 후 1953년 8월부터 육군대학 총장으로 7년간 재직했다. 1960년 5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4·19혁명 후 허정(許政)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아 3·15 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청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였고, 8월 사임했다.

    1961년 7월부터 1967년 9월까지 주이탈리아 대사를 지냈으며,

    1970년 유한회사인 코리아엔지니어링 사장, 1975년 한국 후지필름 회장을 맡았다.

    제9대 및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7년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구락부(星友俱樂部)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밖에도 재향군인회 고문, 한이협회(韓伊協會) 회장, 한일불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종찬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69~27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2월10일 사망했으며, 장례는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러졌다.

    사후 보국훈장 통일장(1급)이 추서 되었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內

     
     
     
     

    護國(호국)의 큰 별 李鍾贊 將軍(이종찬 장군)은 

    慶州李氏(경주이씨) 始祖(시조) 휘(諱) 알평공(謁平公)의 後孫(후손)으로서 

    祖(조)는 正二品(정이품) 正憲大夫 外部大臣(정헌대부 외부대신) 法部大臣(법부대신)

    諱(휘) 夏榮公(하영공)이며, 父(부)는 從二品(종이품) 嘉善大夫侍從院(가선대부 시종원)

    侍從(시종)이었던 諱(휘) 圭元公(규원공)이니라

    名門(명문)의 血統(혈통)으로 智仁勇(지인용)을 兼備(겸비)한 稟質(품질)로서

    일찍이 建軍(건군)의 抱負(포부)를 지녀 6.25 動亂(동란) 시엔 제3사단장으로서

    北進(북진)의 先鋒將(선봉장)이 되어 이 나라 戰史(전사)에

    卓越(탁월)한 戰略戰術家(전략전술가)로서의 英名(영명)을 남겼도다.

    이어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 陸軍大學 初代 總長(육군대학 초대 총장),

    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을 歷任(역임)할새 混沌(혼돈)한 政局(정국)임에도

    威武不能屈(위무불능굴)하는 氣槪(기개)를 보였으니 乙支武功勳章(을지무공훈장)을 비롯한

    數十을 헤아리는 國內外 勳章(국내외 훈장)과 아울러 실로 尊崇(존숭)의 對象(대상)이니라.

    武勳(무훈) 이렇듯 赫赫(혁혁)하거니와 外交官(외교관)으로서 國威(국위)를 宣揚(선양)하고

    國會議員(국회의원)으로서 이나라 民主政治(민주정치)에 크게 貢獻(공헌)한 바 至大(지대)하였는데

    享年(향년) 68세로서 陸軍葬(육군장)으로 모시니 淸廉(청렴)과 勇名(용명)으로

    그 生涯(생애)는 民族(민족)의 精華(정화)가 되었느니라 이에 欽慕(흠모)의 情(정)을 새겨

    그 永遠(영원)한 香氣(향기)를 萬世(만세)에 남기고자 하노라.

    1983년 3월 일

     

     
     
     

    학력 및 경력

     

    1937년 일본국 육군사관학교 졸

    1953년 미국지휘참모대학교 졸

     

    1949년 국방부 제1국장

    1950년 수도경비사령관

    1950년 육군 제3사단장

    1951년 육군참모총장

    1953년 육군대학 총장

    1960년 국방부장관

    1961년 駐 이태리(伊太利, 이탈리아) 대사 겸 희랍(希臘, 그리스) 대사

    1968년 재향군인회 고문

    1972년 韓伊(한국 이탈리아)협회 회장

    1977년 한일불교교류회 부회장

    1977년 성우구락부(星友俱樂部)회장

    1979년 한일의원안보협의회 회장

    1979년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

     

    未亡人 表滋永

    女 李貞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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