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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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 生家)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16. 21:12
경기도 유형문화재, 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 生家) 이 집은 조선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여덟 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열여섯 살에 왕비가 되었다. 그 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가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남양주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 있다. 1996년에 안채를 수리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지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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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感古堂) -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15. 21:05
행랑채(行廊) 행랑채는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신분이 가장 낮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나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연령별로 공간을 분리했고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족생활을 고려해 공간을 배치했다. 사랑채(舍廊) 사랑채는 남자 주인과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니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고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성됐다. 사랑채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사랑채에 모여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고,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던 장소다. 이렇듯 유학을 장려하고 문필 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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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추모비(明成皇后 追慕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3. 12. 19:13
명성황후 추모비(明成皇后 追慕碑) 이 추모비는 명성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두 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하였고, 조각 상층부에는 빛의 표현으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 오오 황후시여 아득히 장하신지고 국가 비운의 막막한 시대에 지존의 배필께서 지혜와 용맹으로 구국의 선봉이 되셨음이여 여기에 감히 황국의 곤전을 해하는 흉진이 어찌 번득였을꼬 황후시여 이 나라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통분이며 치욕이 바로 이 일이나이다 하오나 다시금 세계 안에 약진하는 조국되었으며 황후의 단심을 이 겨례의 심장으로 품으오니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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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유중 신도비(閔維重 神道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3. 11. 19:13
머리 뒤쪽의 ‘王’ 자 領敦寧府事 驪陽府院君(영돈령부사 여양부원군) 신도비는 높이 472cm의 비석으로. 민유중의 둘째 아들 민진원이 전액(篆額)을 썼으며, 큰아들인 민진후가 비문을 썼다. 귀부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민유중 신도비(閔維重 神道碑) 민유중(1630~1687)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로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肅宗)의 장인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민유중은 1650년(효종 1)에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거처 충청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신도비는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민유중 신도비는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거북이 모양의 기단석 몸통을 가지고 있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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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 誕降 舊里碑)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10. 19:11
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탄강구리) 탄강(誕降)은 임금이나 성인(聖人)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구리(舊里)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 탄강 구리는 명성황후께서 태어나신 옛 마을이란 뜻이다. 光武 八年甲辰五月日 排手飮涕敬書(광무 팔년갑진오월일 배수음체경서) 1904년 5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 誕降 舊里碑)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41년(1904) 명성황후 고향 집에 세운 비(碑)이다. 이 비가 있는 곳은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 공부하던 별당이 있던 자리라 한다. 명성황후는 조선 철종 2년(1851)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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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 사랑채 주련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9. 21:11
감고당(感古堂)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장희빈(張禧嬪)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 3년)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다. 원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했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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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9. 20:07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 여주(驪州)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본관, 관향(貫鄕)이다. 시조(始祖) 민칭도(閔稱道)가 여주에 정착한 이후 고려 공민왕 때부터 이름 있는 관료들을 배출하면서 여흥민씨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20세손인 강원도 관찰사 민광훈(民光勳)에게는 시중(蓍重), 정중(鼎重), 유중(維重) 등 덕망 높은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여주에 살면서 삼방파를 형성했고 가문이 번창했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비)의 아버지로 그의 직계는 진후(鎭厚) - 익수(翼洙) - 백분(百奮) - 기현(耆顯) - 치록(致祿)으로 이어지는데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록(閔致祿)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아버지이다. 민치록은 스승 오희상(吳熙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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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순국숭모비(明成皇后 殉國崇慕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3. 7. 21:09
明成皇后 殉國崇慕碑(명성황후 순국숭모비) 아아 세계만방 역사 속에 어찌 이 같은 통분한 일이 있으랴 우리 겨레 모두는 천만년이 지나도 이 면면한 한을 잊을 수 없다. 이곳 녹산(鹿山)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배위되시는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께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왜적의 손에 처참하게도 순국하신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지난 뒤 1895년 을미(乙未) 양(陽) 10월 8일 새벽에 왜제의 사주를 받은 왜인 폭도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무엄하게도 궁성을 포위하고 곤녕합(坤寧閤)으로 침입하여 황후를 시해(弑害) 한 후 다시 이불에 옥체를 싸서 이곳에 옮겨놓고 석유에 불을 질러 시신마저 없이하여 흔적조차 없게 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다 인류 역사상에 어찌 이러한 만행이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