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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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광성보 광성포대(史蹟, 廣城堡 廣城砲臺)카테고리 없음 2022. 1. 1. 19:12
사적, 광성보 광성포대(廣城砲臺) 광성포대는 조선 후기 강화도 해안 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중에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 내에 내성, 외성 12 진보(鎭堡) 54 돈대(墩臺)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砲座)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 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외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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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손돌목 돈대(孫乭項 墩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29. 20:09
강화해협 건너편의 손돌 묘(김포)가 있는 덕포진 - 손돌목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帥字旗) 수자기를 최초로 끌어내린 퍼비스 일병(왼쪽)과 그를 도운 브라운 상병(오른쪽)이 총을 짚고 서 있다. 당시 노획된 수자기는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점령당한 후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1871. 6. 11)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써 미군 측에서는 맥키(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 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릐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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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 강화 광성보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1. 12. 21. 22:08
辛未洋擾戰亡將兵侍郞 殉節墓壇(신미양요전망장병시랑 순절묘단)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신미 순의총은 조선 고종 8년(1871년, 辛未洋擾) 4월 23일 광성보(廣城堡) 일대에서 미 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덕성리) 강화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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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0. 22:10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무명용사비는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군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1823~1871)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19세기의 구미 열강은 우리나라를 약소국가로만 생각하고 선교사나 탐험대를 내세워 무단 입국을 기도하는가 하면 해군 함대를 출동시켜 문호 개방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면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의 연안 포구에 함포 사격을 가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니 병인(丙寅), 신미(辛未) 두 양요(洋擾)와 운양호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 도발을 받을 때마다 애국심에 불타는 강화도 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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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소나무 - 보호수자연과 함께/나무(木) 2021. 12. 18. 22:14
큰나무(보호수) - 소나무 일련번호 : 9-47 (지정연도 2015) 높이 12m, 둘레 2.8m, 수령 약 450년 관리자 : 강화군 시설관리공단 큰나무(보호수) - 소나무 일련번호 : 9-48 (지정연도 2015) 높이 12m, 둘레 2.3m, 수령 약 400년 관리자 : 강화군 시설관리공단 포탄 흔적(砲彈 痕迹)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및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의 격전장으로 노송과 성벽에 각종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황을 말해주고 있다. 초지진(草芝鎭) 소나무 강화군 초지돈대의 소나무 수령은 약 400년 정도 되었다. 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은 모양으로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모양으로 처져 아름다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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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斥和碑) - 조선 1871년(고종 8년)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2. 27. 19:36
척화비(斥和碑) - 조선 1871년(고종 8년)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비석 19세기 후반, 조선은 농민들의 봉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했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웠던 것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