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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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위봉산성(威鳳山城)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28. 19:13
위봉산성 서문지(威鳳山城 西門址) 위봉산성의 성문터는 4곳 중 3곳이 확인되었으며 유일하게 서문만이 반월형 아치 형태로 남아 있다. 완주 BTS 힐링 성지 - 위봉산성 위봉산성(威鳳山城) 및 태조암(太祖庵) 위봉산성은 백두대간의 금남정맥이 장안산에서 소양의 도솔봉으로 내려와 문필봉, 장대봉, 되실봉, 추줄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를 갖춘 능선에 성곽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이란 명칭은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이 봉황이 둥지를 튼 형국에서 생겨난 지명이며, 봉황이 새끼를 낳고 어미 2마리와 새끼 2마리가 도솔봉, 문필봉, 되실봉, 장대봉으로 날아가 앉았다 하여 위봉이라 하였다. 숙종 원년(1675) 전라감사 겸 부윤 권대재(權大載)가 위봉산성 내에 행궁을 조성하여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어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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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이태조 행궁지(李太祖 行宮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31. 20:12
史蹟 李太祖 行宮址(사적 이태조 행궁지) 이태조 행궁지(李太祖 行宮址) 조선 초기에 세운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의 행궁으로 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이 왕이 되자, 이성계는 적개심을 품고 개경을 떠났다. 하지만 함흥에 있는 함흥본궁으로 바로 가지 않고 소요산에 행궁을 지어서 살았다. 이 행궁을 이태조 행궁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현종 4년(1663년)에 지은 미수기언(眉叟記言) 제9권 소요산기에 따르면 소요산 골짜기 입구 안팎의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우거진 숲 속에 두어층의 층계 만이 남아있으니 이것은 영락제 때 태상왕의 행궁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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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자연과 함께/나무(木) 2021. 11. 23. 19:17
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2)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보호수(느티나무 2그루) 고유번호 : 연천-6 수령 : 약 600년, 수고 : 20m, 나무둘레 : 390cm 지정일자 : 1982. 10. 15.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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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 보물 제1925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12. 5. 19:39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金剛山 出土 李成桂 發願 舍利莊嚴具 一括) - 보물 제1925호 이 사리장엄구는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인 많은 신하들과 함께 발원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로서 1932년 금강산(金剛山)월출봉(月出峰) 석함(石函)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석함 안에서 사리의 외기(外器)인 백자대발(白磁大鉢) 4개와 은제도금라마탑형사리기(銀製鍍金喇嘛塔形舍利器), 이 사리기를 안치한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銀製鍍金八角堂形舍利器), 그리고 청동발(靑銅鉢)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 중 백자외합 내면과 백자발 외면, 유기완 구연부,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 내 은제팔각통형, 은제도금라마탑형사리기 내 은제원통형에 발원자와 발원 목적과 내용, 제작 장인 등 조성경위를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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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建元陵) -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능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1. 1. 22:30
건원릉(建元陵)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능 조선 제1대 왕인 태조(太祖,1335~1408,재위1392~1398)는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태어났고, 1392년에 조선을 창건한 후 1408년에 돌아가셔서 이곳에 안장되었다. 태조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군주의 무덤답게 동구릉 중에서 유일하게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대형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본래 태조는 먼저 돌아가신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도성 안에 조성하면서 자신이 묻힐 터로 삼았으나, 태조의 아들인 태종이 이 지역에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건원릉을 관리하기 위하여 재궁(齋宮)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는 돌아가실 때 자신의 무덤에 고향에서 나는 억새(청완,靑薍)를 심으라는 유언을 남겼..